클래식은 좋아하지만 잘 모른다. 좋아해서 아는 척하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
작품이 좋아서 한동안 곡 제목을 열심히 외다가도 일상의 언어와 섞이다 보면 금세 잊힌다.
누구의 작품 번호 몇 번, 무슨 장조, 단조, 알레그로, 안단테 어쩌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한 곡을 소개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다.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 이렇게 간단하면 좋으련만.
내가 원하는 클래식 곡을 음원 사이트에서 찾는 것만도 쉽지 않다.
분명 들으면 아는 곡인데, 대체 어떻게 찾아야 할까?
베토벤이든 차이코프스키든 교향곡인지, 협주곡인지 알아야 하고 번호도 알아야 하고, c든 d든 장단조를 알아야 하고. 지휘자나 오케스트라까지 곡마다 다르니 그때 들은 그 곡을 제대로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가 이렇게 길게 나열되면 문외한은 소외된다.
취향에도 계급이 있다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지만(싫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앞서 말하는 근거에 클래식음악이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곡을 찾고, 듣는 데서부터 접근성이 떨어지면 어렵다고 느끼니까. 제목이 일단 너무 길다.
그럼에도 클래식이 좋은 건 내게 ‘여지’ 때문이다. space!
클래식을 들으면 쉴 여지, 생각할 여지, 감상할 여지가 있다. 클래식에는 내가 들어갈 공간이 있다. 대중음악에는 작사가와 작곡가의 꽉 찬 자의식으로 인해 내가 들어갈 여지가 비좁은 반면 클래식은 공간이 넉넉하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래서 클래식을 들으면 편안하고 여유가 있다고 느낀다.
지금보다 젊었을 땐 여유를 옳지 않은 개념으로 단정했다. 여유는 꿈이 없고 삶의 투지가 없는 회색 인간들이 인생을 회피하는 방식이라고 이해했다. 분주하고 겨를 없이 살아가는 것이 청춘에게는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자세라고 믿었다.
조금 살다 보니 인생에서는 ‘절대’라는 게 없는 듯하다. 신념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변하고,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인연도 끝이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굳은 신념처럼 좇았던 꿈은 밥벌이로 연결되지 못한 채 희미해졌고, 한때 종교처럼 붙들었던 인생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변질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경험함으로써 내 안에 들여놓는 그림이 많아지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속은 점점 빈 틈이 없다. 나의 세계는 확장되지 않는데 들이는 게 늘어나니 좁고 답답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여유를 찾는다.
여유의 아름다움을 알고 나니 음악을 듣는 취향도 바뀌었다. 김동률(영원한 나의 동률 군), 토이에서 BTS, 뉴진스, 칼리드와 포스트말론, 팻 메스니까지 듣는 취향의 스펙트럼은 전면적인 편인데 요새 내 멜론 리스트를 보면 클래식이 대부분이다.
윤종신의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제목도 외우지 못할 그’ 음악들. 그런데 꼭 배경지식을 알아야 할까, 제목을 알아야 할까? 안단테든 알레그로든 음악을 듣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누가 뭐래?) 만날 들어도 못 외우니 무안해서 그런다.
나는 뭐든 진짜 좋아하면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좋아한다. 클래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이먼 래틀 경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내한하여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협연했을 때 고민 없이 표를 사고(월급쟁이 주제에 2장에 80만 원을 쓰다니), 계촌 클래식 음악축제에 참여 신청도 해서 표를 구하고, 윤보선 고택에서 매년 열리는 클래식 축제에도 다녀왔다.
클래식은 내게 정을 주지 않는데 나는 개의치 않고 좋아한다. 조금만 친절하고 다가가기 쉬우면 좋으련만.
좋아하면 잘 알게 된다는데 언젠가 알게 될까?
이 사람의 이 작품, 누가 지휘한 곡이 정말 좋아요. 들어보세요, 하고 아는 척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