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구내식당 입구 우측 벽면에 화이트보드가 걸려있다.
여기엔 밥을 뜬 순서대로 테이블에 앉아달라든가, 식사표에 식사 여부 체크를 해달라든가 하는 글이 쓰여있기도 하지만 주로 어느 부서, 누가 고향에서 옥수수를 가져왔다, 무슨 기념일에 맞춘 떡이 들어왔다는 등 직원들의 음식 나눔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을 때가 많다.
직원들이 식당으로 가져오는 음식은 다양하다. 떡, 수박, 에그타르트, 옥수수, 감자, 포도, 식혜, 쫀드기 같은 주전부리, 주로 디저트다.
‘총무부 직원 김 xx 님이 상추와 고추를 주셨습니다.’
말복 즈음,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앞 줄에 선 직원과 식당 조리원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부모님이 텃밭에서 기른 상추와 풋고추를 직원이 가져온 모양이다.
어르신들이 식구들 먹을 양으로 조금 심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달리는 이파리와 열매의 양이 가족의 입만으로는 감당이 안 됐단다.
상추는 때에 맞춰 따지 않으면 꽃대가 올라오고 쇄서 못 먹기 때문에 바로 수확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날 반찬이 놓인 테이블 끄트머리에, 둥그런 뷔페 접시에 놓인 상추와 풋고추가 보였다.
상추는 겹겹이 포개어져 높다랗게 쌓여있고, 풋고추는 둥그런 만다라 형태로 펼쳐져있었다.
한눈에 봐도 우리 회사 직원들이 오늘 양껏 먹어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수확물에서 텃밭을 정성 들여 가꾼 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처럼 치밀하고 매끈한 표면을 가진 산물이라니!
상추는 아직 여린 티를 벗지 못해 주름마저 옅어 보였고, 풋고추는 겉에 흠 하나 없이 매끈하고 투명한 빛을 띠었다.
일찌감치 밥을 떠서 자리를 잡고 앉은 직원들이 채소가 싱싱하고 맛있다며 감탄했다.
채소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평소 먹던 것보다 상추는 두 장 더, 고추는 하나 더 가져왔다.
“선생님, 채소 진짜 맛있어요. 달라요. 드셔보세요.”
내가 식판을 들고 와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직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반짝이며, 본인의 맛에 어서 동조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풋고추를 들어 올렸다. 입에 넣으려는 찰나, 꼭지 바로 아래에 정교하게 뚫린 작은 구멍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이것은 벌레의 길인가 싶었지만 구멍이 두 개이니 아마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라 나왔겠구나, 나름의 추리를 했다.
대체 어떤 용감한 벌레가 매운 고추 속에 머물러 있겠나, 하는 ‘합리적’ 추론이었다.
“올해 먹은 풋고추 중에 최고! 진짜 살이 얇다. 어떻게 고추가 이렇게 야들야들하지?”
풋고추를 한입 깨물자마자 연하고 아삭한 식감이 미각을 돋웠다. 약간 매운맛이 있어 씹을수록 개운하고 침이 돌았다.
맞은편 직원에게 정말 맛있다고, 당신 말이 맞다며 밥 숟가락을 뜨는데 식판 오른편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내 앞니 모양대로 고르지 않게 잘린 고추 안에서 초록빛깔 미물이 몸을 반만 내민 채 꿈틀거렸다. 그러곤 들락날락 분주하였다.
부지불식중에 집의 반쪽을 잃은 초록색 애벌레가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내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커다란 진동이 느껴지고 굉음소리가 나더니만 집의 절반이 사라졌지 뭐야, 이 무슨 날벼락이야?, 하는 얼굴로.
“응? 고추에도 애벌레가 사네? “
우리 집에는 반려 곤충이 여럿이고, 유충도 있어서 애벌레가 징그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손이 큰 남자의 검지만큼 두껍고 기다란 장수풍뎅이 유충 세 마리를 1년 가까이 애지중지 성충이 되기까지 길러냈다.
‘애’라고 하기엔 너무 큰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애벌레에 비하면 나비 애벌레는 그저 어여쁘다.
나는 새끼 고양이를 바라보듯 그것의 움직임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애벌레는 더듬이를 까딱거리며 감각의 신호를 바짝 세우고서는 제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갈까, 말까? 죽은 척할까?’
“으악”
“흐억”
맞은편에 앉아있던 직원 둘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입을 가린 채 의자를 뒤로 거칠게 밀어내며, 식탁에서 일어날 기세로 몸을 들썩였다.
토할 것 같다는 시늉을 하며 손을 휘적였다. 빨리 눈앞에서 치우란다.
“고추가 꽤 매운데 얘는 맛을 못 느끼나 봐요. 냄새도 못 맡나? 너는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고추 집을 골랐니? 하마터면 너까지 먹을 뻔했잖아.”
애벌레와 즐거이 교감하고 있노라니 좌중의 시선이 쏠렸다. 흠. 사회생활은 해야 하므로, 나는 애벌레와 내가 망가뜨린 그의 집을 티슈로 싸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디에 놓아줄까 고민하다가 돌계단 옆 화단에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사람들이 쉼 없이 오가는 길목이니 애벌레를 잡아먹을 만한 천적이 그나마 적지 않을까 싶어 그리하였다.
”새한테 잡아 먹히지 말아라. 생존은 눈치 싸움이다. 눈치껏 잘 살아남아서 나비가 되렴. “
집에 돌아와, 곤충기(bug period)를 호되게 지나고 있는 아이에게 그림으로 그려가며 이야기를 전하니, 부산스러운 동작을 멈추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 시간을 갖고서 입을 떼었다.
“엄마, 그 애벌레는 고추 집 안에 있기 때문에 괜찮을 거야. 새는 매워서 고추 못 먹을 걸? 잘 숨어있다가 나중에 나비 되겠지. 걱정하지 마.”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자 한 말인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인지 모를 말을 하고서 아이는 다시 제 놀이에 빠져들었다.
같은 마음으로 나도 응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