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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화 Jul 10. 2023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받는가

『SF 보다 Vol. 1 얼음』구병모 <채빙> 서평

 

『SF 보다 Vol. 1 얼음』표지, 문학과 지성사

 줄거리


 지구의 얼음이 모두 녹았다. 세계 문명은 멸망했고 생존 인류의 다음 세대만이 남아 원시 사회를 겨우 벗어난 수준으로 살고 있다. 변변찮은 사회를 유지하는 건 채빙꾼들이 가져오는 고산의 얼음이다. 어느 날 주인공 ‘나’는 고산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몸의 존재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부동의 상태로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나’의 눈앞에 한 채빙꾼이 꽃을 바치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처럼 신으로 받들지도, 불가능한 일을 기도하지도 않는 그는 자신이 마주하는 풍경을 ‘나’에게 그저 읊을 뿐이다.


 햇빛의 광자가 ‘나’에게 부딪혀 채빙꾼의 시세포를 자극한다. 채빙꾼은 인류에게 남은 작은 희망이라도 되는 듯 얼음새꽃을 ‘나’에게 보여준다. ‘나’는 그런 채빙꾼의 행동에 감화돼 그를 응원한다. ‘꽃’, ‘희망’, ‘따스함’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강해지며 주인공을 변화시킨다. 스스로 인간인지 통 속의 뇌인지 무엇도 아닌 기묘한 존재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던 ‘나’는 소설 말미에 물리적 실체에 대한 의문을 뒤로하고 마음 가득히 피어나는 샛노란 빛을 받아들인다.


 구병모의 <채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풍경을 ‘나’의 한정된 시야로 묘사한다. 시각과 청각 외의 외부 자극은 일체 차단돼 위치도 자세도 바꿀 수 없는 ‘나’는 연극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한다. ‘나’는 사건 간 공백의 시간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지만 뚜렷한 의식으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요컨대 자신에게 얼음새꽃을 매번 가져다 놓는 한 채빙꾼에게 호감을 품고 그의 삶에 관심을 둔다. 이후 벌어지는 채빙꾼의 죽음, 자발적인 외부 감각 차단, ‘나’를 찾아온 후손과 그 일행 중 한 명이 바친 샛노란 얼음새꽃의 목도까지 그려내며 <채빙>은 ‘나’의 내적 변화를 찬찬히 드러낸다.



 자기 인식의 모순을 뒤집는 하나의 질문


 <채빙>은 의식만 깨어있는 존재를 과연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과학적 관점에서 실재의 증명 여부는 오로지 관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의해 물리적 변화가 일어나야 ‘존재한다’고 판명된다. 사건에 개입하고 동시에 개입 받아야만 존재는 비로소 ‘거기 있음’을 확답 받는다. 이 관점에서 ‘나’는 마음(이라 부르고 뇌의 전기 신호가 일으키는 복잡다단한 과정)에, 채빙꾼은 행동양식에 변화가 생겼으니 서로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친다면 모든 일이 ‘나’의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어진다. 여전히 망망대해를 떠도는 탱크 속 ‘나’의 상상일지, 어쩌면 실체라곤 갖지 못한 호접지몽일지 확신할 수 없다. 이를 드러내듯 초반부 ‘나’는 의식과 몸에 대해 거듭 회의한다. 세상의 모든 자극을 오롯이 나라는 개체를 거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메커니즘은 그 어떤 위대한 진리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든다. 과학의 객관성도 침범할 수 없는 자아의 영역에서 인식이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라면 결국 우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와 우주를 분리하는 일이 자아 인식의 첫걸음이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자신과 우주의 경계를 흩트린다. 이는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개체에게 커다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보여주기 위해 <채빙>은 생각만 할 수 있는 존재로 ‘나’를 내세운다. ‘나’가 자신의 신체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추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지반을 단단히 밟고 살아가면서도 삶은 무얼까, 태어난 이유는 무얼까, 왜 살아가야 할까 고뇌하고 괴로워한다.


 <채빙>은 ‘나’의 존재론적 고민이 서서히 바깥 세계의 채빙꾼에게 옮겨가는 과정을 그린다. 얼음새꽃의 향기를 상상하면서부터 ‘나’는 자기회귀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 호감을 가진 인간에 대해, 그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생각의 중심을 옮긴다. 채빙꾼의 죽음으로 사고를 중단하고 심지어 영원한 잠을 청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 앞에 얼음새꽃이 다시금 나타났을 때, 존재를 비관하던 ‘나’는 선명한 감각과 풍부한 감정으로 되살아난다.


 자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던 유아기를 지나, 상상 놀이를 즐기는 유년기를 거쳐, 삶을 회의하는 청년기를 통과해,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 속에서 온갖 감정을 느끼는 중년기를 거치면 비로소 삶을 예찬하는 노년기가 된다. 왜 태어났을까, 왜 살아갈까, 삶은 뭘까..... 결코 진실에 가닿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회귀하는 존재 증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단단한 자아의 세계를 깨부수고 바깥에 의해 개입 받아야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며 존재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무엇이 삶인가?’로 질문을 뒤집는 순간 답을 찾아가는 모험으로 바뀐다. 그 모험에서 우리는 어떤 답이든 삶으로 귀결시킬 수 있게 된다. <채빙>은 신체의 능동성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 ‘나’의 비극을 유예하지만 존재론적 증명의 굴레에서 ‘나’를 잠시간 해방시킨다. 해빙꾼의 영혼과 재회하는 듯한 결말부의 따스한 감각과 감정의 발현은 ‘무엇이 삶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상호가 반응해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곧 삶이라고.     



 구성 방식 분석과 보완점


 자기 인식, 존재 증명, 삶의 이유 등 추상적인 주제를 은유적으로 전달하려면 인물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이를 위해 SF의 하위 장르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선택한 것은 적절했다. 우리는 평생 주관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물화하기 위해 ‘나’를 냉동인간으로 설정하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한 것 역시 알맞은 접근방식이다. 과거 일을 설명하는 플래시백도 사실상 ‘나’의 현재 서술임을 고려한다면 순행적 구성은 3차원의 존재가 시간을 역행하거나 선행할 수 없다는 우주의 원리에 부합한다.


 인간의 욕망과 그에 따른 파멸을 비유하기 위한 소재로 채빙을 고른 점은 무난했다. 한정된 자원이라는 원관념을 얼음이라는 보조관념에 비유하면서 세 가지 속성; 차갑고, 조건을 갖춘 곳에서만 발생하고, 쉽게 녹아 없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세상을 멸망시켜 사회의 논리를 단순화하면서 발생된 도식적인 메타포는 독자에게 진부하게 다가올 수 있다.


 종반부 학자 무리가 등장하며 ‘나’의 존재를 과학적이고 명료하게 설명해버리는 기술은 소설 전체에 핍진성을 더하나, 자아 인식이 지닌 아이러니와 우주와 개별 존재의 신비로운 관계를 일축하게 한다. 필자는 대안으로 ‘나’의 실체가 냉동인간이라는 사실을 학자가 아닌 후손이 우회적으로 드러내도록 하고, 얼음새꽃을 바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더욱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비정기적으로 책, 연극, 사회문화 현상에 관한 고찰을 담은 글을 올립니다. 경직된 문체가 다소 어렵게 읽힐까 우려되지만 그만큼 진지한 태도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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