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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 나혜석과 이광수 이야기

by 양문규

이광수는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이 엄청난 인기를 끌자, 『무정』 연재가 끝나고서 곧바로 『개척자』를 연재한다. 『개척자』는 『무정』보다도 계몽적 메시지가 강렬하고 근대소설의 느낌도 더 나지만, 『무정』만큼 대중 독자들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또 다른 지면을 빌려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선 『개척자』의 남녀 주인공이 이광수 자신과 나혜석을 모델로 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즘을 실천한 문학가이다.


소설 『개척자』의 여주인공 ‘김성순’은 오빠의 친구이자 예술가인 ‘민’과 사귄다. 그러나 오빠와 어머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을 한다. 오빠가 누이의 혼인을 반대한 이유는, 민이 가난한 예술가일 뿐 아니라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점 때문이다.


김성순의 오빠는 동경서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칠 년 간을 실험실에 칩거하며 신발명을 꿈꾸는 화학자다. 그는 원래 재물을 멀리하고 연구에 몰두하는 순수한 과학도였으나, 나중 금전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자 누이를 부자 친구에게 팔아버리려고 한다.


민이 가난한 예술가이고 유부남이라는 설정은 당시 이광수의 처지와 비슷하다. 게다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은 이광수의 친구였고, 실제로 ‘동경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중앙학교 화학 선생이었다. 나경석은 『개척자』의 오빠와 같이 이광수와 나혜석의 교제를 반대했다.


이광수가 나혜석에게 관심을 가진 시기는, 『개척자』 발표 전, 나혜석의 첫사랑이었던 시인 최승구(소월)가 요절했던 때 즈음이다. 이 시기 이광수는 나혜석과 동시에 의학도 허영숙을 사이에 두고 사랑의 저울질을 한 듯싶다.


1918년 이광수는 본처 백혜숙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허영숙과 중국 베이징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그 와중에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쓴 편지에, 나혜석과 관련해 해명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자신은 나혜석을 유혹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달라는 얘기다.


이러한 해명은 친구 나경석에게도 하는데, 그럼에도 나경석의 이광수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나경석은 친구인 이광수가 비단 자기 누이만 아니라 허영숙과 교제하는 것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혜석과 허영숙 집안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당시 어느 잡지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무슨 문학 대가니 무슨 천재니 무엇이니 하고 떠드는 자가, 자식까지 낳고 살던 아내더러 ‘너는 사람이 아니니 가라’고 해놓고 아직 이혼도 다 되지 아니하였는데 그저 이 처녀 저 처녀에게 참사랑을 가졌다 하며 결혼 청구를 한다더라.”


이광수는 『개척자』 외에도 여러 소설 등에서 나혜석을 암시하는 여인들을 지속적으로 등장시킨다. 마치 나혜석 스토커(?) 같기도 하다. 나혜석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이광수 나름의 원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에 비해 나혜석은 평생을 통해 이광수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반면 그녀는 자신의 요절한 애인과 남편과의 연애사에 대해서는 나름 꽤 진솔한 내용을 피력하고 있다. 제삼자가 남녀관계의 내밀한 진실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이광수는 소설 『무정』과 『개척자』 등에서 ‘자유연애’라는 의제를 내세워 구시대의 봉건적 인습의 타파를 주창하지만, 이 모두가 본처와 이혼하고 여러 신여성들과 연애했던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거나 합리화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게 한다.


이에 비해 나혜석은 열정적 연애를 했음에도, 작품 속에서 연애 이야기는 없다. 대신 신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그리면서 봉건적 인습의 문제를 제기한다. 나혜석 소설은 구체적이고 진솔한데, 이광수 소설은 자유연애를 그리지만 피상적이고 위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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