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발트 삼국 중 제일 끝 나라인 리투아니아서 벨라루스를 거쳐 러시아로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미리 주한 벨라루스 대사관을 가서 ‘통과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통과비자는 오로지 통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비자로 입국한 후 48시간 안에 출국해야 한다.
이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 벨라루스에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표도 미리 구매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온라인 구매를 할 수 없었기에 대사관에 가서 그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현지 가서 반드시 구매하겠다는 다짐을 한 후에야 간신히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여권으로 유럽 대부분의 나라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었는데 벨라루스만 그것이 불가능했다. 여행 당시에도 EU 국가인 발트 삼국과 달리, 벨라루스 국경을 통과할 때는 통관절차를 기다리는 화물차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작 국경 검문소에서 입국심사는 어렵지 않았는데, 일행을 태운 버스가 한 시간 너머를 지체하며 떠나지를 못했다. 그 사이에 검문소로 다시 불려 가는 사람도 있었다. 버스 승객 중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는데 혹시 우리 때문에 차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한참을 지나니 운전사가 모두 차에서 다시 내리라고 했다. 또다시 출입국 검문소를 가라는 건가 하며 영문을 몰라했다. 영어를 하는 승객을 간신히 찾아서 사정을 물었다. “Broken!”하는 짧은 대답이었다. 차가 고장 나서 다음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갈아타게 된 것이다.
샤갈이라는 화가가 있다. 환상적 신비주의 화풍으로 유명한 그는, 러시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벨라루스 출신이다. 벨라루스는 제정러시아 시절 러시아에 속해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소러시아”, 벨라루스는 “백러시아”라 불렸다.
샤갈은 벨라루스 출신에다 유대인 출신이었다. 제정러시아 말기 많은 유대인이 대량 학살 또는 추방되는데 이로 미뤄 보건대 당시 샤갈의 처지가 어땠는지 익히 짐작이 간다. 샤갈 본인은 유대인 신분이라서 러시아 안에서조차 자유롭게 이동을 하지 못했다.
그가 미술 공부를 하러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고자 했으나 당시 유대인은 국내 여권이 없으면 수도로 들어갈 수 없어 친구의 여권을 빌려서 간다. 그는 이후 1910년 파리로 건너가 명성을 얻은 후 벨라루스로 다시 돌아와 고향 여자와 결혼식을 치른다.
그러나 일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국경이 폐쇄되면서 러시아 안에 갇힌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샤갈은 그곳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기 어려워졌다. 샤갈은 프랑스로 갈 여권을 당국에 요청하나 소비에트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수년 후 간신히 여권을 발급받고 파리로 가게 됐으나, 이번엔 프랑스 쪽에서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과거 파리에서 살았다는 파리 경찰청장의 확인서를 제출한 후에야 간신히 가게 된다. 이후 샤갈은 자신의 고향인 벨라루스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무국적자로 남는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가 점령한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 법률이 통과하자 무국적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된다. 이 때문에 샤갈은 마르세유로 도망가지만 파리 경찰에 긴급 체포된다. 유대인 긴급 구조위원회의 극적인 구조로 프랑스를 탈출해 미국에 가서 정착한다.
샤갈은 평생 제대로 된 여권과 비자 없이 세계를 떠돌아야 했던 난민이다. 그의 예술적 명성이 그나마 그의 예술과 인생을 건졌다. 고향을 잃고 떠돌았던 그의 삶이 그의 그림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마을의 민속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리는데 주요한 동력이 됐을 것이다.
벨라루스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틈에 끼여 역경을 치렀고 지금은 유럽에서 몇 안 되는 독재국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났던 벨라루스 사람들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친절했다. 비자 문제만 없다면 며칠 더 묵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벨라루스의 역사적 상흔은 이 나라 출신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도 잘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여행 중 만난 이곳 사람들의 선한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왜 이 나라서 샤갈 같은 화가가 태어났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