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순이를 어쩔까나
이사 갈 집은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먼저 살던 주인이 급매로 내놓은 집이었는데 지어진 지 20년쯤 된 빌라로 1년 전쯤에 집수리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은 깨끗해 보였다. 전 주인은 그렇게 집수리를 하고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이사를 가게 됐다고 많이 아쉬워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행운을 얻은 셈이기도 했는데, 세상 사는 게 그렇구나 싶기도 하다. 누구에겐 응달이 또 다른 사람에겐 양달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제니는 그렇게 제 수명을 다하고 죽었지만 문제는 삼순이였다.
이사 갈 집은 공동주택이니 아무래도 삼순이를 데려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땅히 누가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오빠는 자기 때문에 이사를 가게 생겼으니 미안해서 그런지 삼순이를 그냥 데려가자고 했다. 하지만 누가 삼순이를 반기겠는가. 설혹 이해를 구한다고 해도 어느 날 개도둑이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낭패가 아닌가. 꼴좋다. 집까지 팔아대더니 개조차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오빠의 무능함에 혀가 끌끌 찼다. '이사할 때 같이 가지 말아야 할 존재는 너야. 알아?' 나는 이 말이 목까지 차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렇게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인천에 사는 이모가 데려가겠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역시 궁하면 통한다더니 다행이다. 사실 이모도 개를 키운 경험이 없지 않은데 어느 때부턴가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삼순이의 사정이 딱하게 생겼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삼순이로서는 우리에게서 또 한 번의 파양을 당하는 것이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삼순이를 데려가기로 한 날 이모와 이모부는 아침 일찍 도착해 안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삼순이만 데리고 바로 돌아갔다. 식구들이 아직 잠에서 깰 때가 아니었는데, 나는 안에서 삼순이가 가는 걸 그저 소리로만 듣고 있었다. 보내 놓고 엄마는 녀석이 안 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던지 혼났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녀석이 사라진 텅 빈 마당을 거실 통유리를 통해 바라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개들이 우리 집 마당을 거쳐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개는 평생 묶여만 있어서 살이 뒤룩뒤룩 찌기만 했다. 너무 운동을 안 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알지 못하는 어떤 병이 있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마당을 나와 보니 죽어 있었다. 어떤 강아지는 이제 밥을 먹어도 될 만큼 컸는데도 밥 알 하나 못 삼키고 굶어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개들은 다 집 나가 죽었을 것이다. 개들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간다는 속설이 있던데 그게 정말 맞는 얘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날 아버지가 조그만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 오셨다.
우린 그 강아지에게 뽀삐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 우린 이미 마당에 '캣츠'란 개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이름의 수캐를 키우고 있었는데, 뽀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녀석을 잡으러 뒤쫓아갔지만 워낙에 발이 빨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집안 어른에게 잡아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들은 지가 죽을 때가 돼서 나간 거라며 태연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거야 말로 개구라는 아닐까. 설혹 그게 사실이어도 사람은 지켜줄 수 있는 데까지 지켜줘야 한다. 그 개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면 말이다. 개는 제 주인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로써 삼순이는 우리 집 마당을 거쳐간 마지막 개가 되었다. 많이 사랑을 주지도 못했다. 그래도 녀석은 우리를 좋아했고 애교가 많았다. 그런 녀석이 지금쯤 얼마나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이모와 이모부가 잘 키워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삼순이가 간지 이틀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이모한테서 전화가 왔다. 삼순이가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개를 다시 키울 생각이었다면 목줄이라도 준비하고 데려갈 일이지 그런 준비도 없이 개만 데리고 갔다. 지하 셋방 사는 사람에게 삼순이 얘기를 하고 목줄 살 때까지 문단속해 주길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야 그런 부탁이 가능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그걸 알리가 없다. 전날 짜장면 배달 온 사람이 모르고 문을 살짝 열어 놓은 사이 녀석이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이모는 그 즉시로 녀석을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아무래도 새 주인을 알아볼 리는 없고, 지금쯤 동네 어느 틈엔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며 엄마가 와서 같이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엄마는 전화를 끊고는 아침도 먹지 않고 서둘러 이모네로 갔다. 엄마는 집을 나설 때 머플러를 두어 개 챙겨서 갔다. 그때는 아직 더운 여름이라 머플러가 필요가 없을 텐데 의아했지만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와 이모는 그날 하루 종일 삼순이를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엄마는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는데 얼마를 돌아다닌 건지 어깨엔 고단함과 낙심이 한 짐은 올라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모네에서 자고 내일 가겠다고 했을 텐데 하필 그 내일은 이사 하루 전날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아주 많이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제야 머플러는 왜 가져갔냐고 물었다.
"주인 냄새 얼른 맡으라고 가져간 거지."
순간 엄마의 순발력은 알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급하게 집을 나와야 할 상황에서도 머플러를 생각했을까. 하지만 이내 엄마와 이모가 그 머플러를 흔들며 하루 종일 삼순이를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그다지 좋은 그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엄마까지 합세해서 간절히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나오질 않는 것을 보면 개장수에게 붙잡갔거나 사고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럴 경우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목줄부터 준비하지 못한 이모 일까. 아니면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지하에 세든 사람과 짜장면 배달부일까. 삼순이로선 남의 집에 와서 목줄에 채워지지 않은 건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더구나 짜장면 배달부 덕분에 다시없는 기회를 맞았으니 일단 그 집만 나오면 옛 주인집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옛 주인집은 서울이고 녀석은 지금 인천에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혹 녀석이 똑똑해서 몇 날 며칠에 걸쳐 옛 주인집을 찾아온다고 해도(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사한 후가 될 것이다.
아, 삼순이를 어쩔까나. 삼순이가 불쌍해서 어찌할까나.
나는 애초에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오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집만 안 날려 먹었어도 이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뻔뻔스럽고 무책임한 나쁜 놈 같은 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오빠 말대로 이사할 때 삼순이와 같이했어야 했다. 지금은 믹스견이라 불리는 잡종견도 안에서 키우지 않는가. 그때는 그런 개는 안에서 키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데려왔다면 삼순이를 키울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