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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Apr 10. 2023

용서할 준비되셨습니까?

사실 영화 속 주인공 맥은 비운의 남자다. 

어렸을 땐 아버지의 구타를 견뎌내야 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나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나 했더니 막내딸을 성폭행범에 의해 잔인하게 잃어야 했다. 그러니 그의 내면이 온전할까. 또한 한 가정의 가장이 이런데 가족들은 어떠하겠는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장 같지만 한마디로 그는 상처투성이다. 그나마 신앙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는 것이지 신앙이 그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해주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문서함에서 집 근처에 있는 오두막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는다. 거기엔 어떠한 뚜렷한 초청자의 정보도 없다. 무엇보다 그곳은 막내딸을 잃었던 그 장소이기도 하다. 처음엔 갈까 말까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뭔가의 이끌림으로 결국 가기로 한다. 그리고 거기서 놀라운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원작 소설 '오두막'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기독교색이 짙은 판타지 작품이기도 하다. 또 그런 만큼 영화도 장면이 수시로 바뀌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화사하면서도 화려하고 몽환적 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을 나름 충실히 구현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맥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인생의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하게 된다. 무엇보다 아버지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화해와 용서를 한다. 무엇보다 그는 딸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만 알뿐 시신도 찾지 못해 변변한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오두막에 머무는 동안 딸의 시신을 찾게 되고 비로소 소박하지만 진정 어린 장례식을 하게 된다. 그걸 보면서 장례식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예식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쩌면 이 세상엔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사람 못지않게 아니 그 보다 훨씬 장례식을 치를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맥이 오두막에 초대된 보다 더 중요한 건 딸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맥은 저항한다. 그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라도 나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용서할 수도 없지만 용서하면 내 가족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일 테니까. 더 나아가 이제부터 내가 살아 있는 건 원수 갚음에 있다고 복수자로 거듭남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볼 무렵 우연찮게 나는 '유키즈 온 더 블럭'에 나온 이지선 교수를 보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여기에 따로 언급을 하지는 않겠지만, 거기서 이지선 교수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사고를 낸 사람이 와서 사과하더냐고. 거기에 대답은 당연 아니요다. 당연 아니오. 억울하지만 우린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나는 자신에게 또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도 못 할 끔찍한 상처를 입혀놓고 그 상처의 당사자가 와서 사과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범인이 용서만 구하면 바로 용서해 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게 사람을 더 억울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뉴스에 나올만한 흉악무도한 범인들을 보라. 그들은 카메라인지 아니면 범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특정다수 앞에선 미안하다고 한마디를 날릴 수는 있어도 피해자나 앞으로 자신으로 인해 어떤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갈지 알 수 없는 가족들에겐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인가.


하지만 이지선 교수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그들에 대해 꼭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놀라운 건 그 뒤엔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지선 교수 앞에서 함부로 동정하거나 섣불리 가해자의 응징을 논하지 않고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대해줬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고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지선 교수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표현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사실 이지선 교수 같은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맥 같이 마냥 자신을 연민하거나 복수를 꿈꾸거나 한다. 하지만 그 오두막의 주인인 파파와 그를 돕는 두 명의 젊은 남녀는 맥에게 범인을 용서하라고 거의 종용하다시피 한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맥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처음엔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저항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용서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시로 용서한다고 되네라고 한다. 그러면 처음엔 쉽지 않지만 자꾸 하다 보면 정말 용서하게 될 거라고. 사랑이 학습의 산물인 것처럼 용서 역시 학습의 산물임을 오두막의 세 사람은 맥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화해와 용서를 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닐까. 세상은 복수가 멋있지 용서는 하찮고 힘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를 영화는 묻는다.  


사실 오두막의 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색이 짙은 영화로 파파는 짐작하겠지만 하나님을 의미하고,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천사 또는 성령 의미하고 그렇게 셋이 있다는 건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놀라운 건 바로 기존의 이미지를 깨는 하나님의 이미지다. 초로의 뚱뚱한 여자를 파파로 부르며, 두 남녀는 야성미에 아름답기까지 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을 얼마나 용서하고 구하면서 살았을까 되돌아보게 됐고, 동시에 맥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을 아무나 하겠는가. 특히 오두막에서의 체험은! 그게 비록 영화 또는 소설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맥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각자의 몫이다.  


우린 남을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있고 (성경은 천국은 마음에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복수의 상상. 복수의 칼날 그런 거 갈지 말아라. 그거 하나도 소용없고 오히려 자신만 상한다. 위에 계신 분은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안 믿겠지만 복수는 신의 영역이다. (이것 역시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용서를 하지 못해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강력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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