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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Apr 26. 2023

많이 사랑하는 쪽이 많이 닮는다


브랜단은 교사이면서 교회 성가대원이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사람의 성격이 어떨지 대충 감이 온다. 아니나 다를까 좋게 말하면 보수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원리원칙이고 소심하다. 그런데 비해 트루디는 딱히 직업이 뭔지도 모르면서 발랄하고 때론 대범하고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브랜단과는 완전 반대의 성격이다. 이것은 브랜든으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든다. 


둘은 동거를 하고, 트루디는 자꾸 핑계를 대며 매일 밤 어딘가를 나간다. 그러는 사이 브랜단은 TV에서 엽기적으로 살인을 하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고 그게 또 정황상 트루디와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어 의심을 하게 된다. 결국 트루디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도둑이다. 브랜단은 충격을 받지만 트루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와 공범이 되어 자신의 학교에 있는 컴퓨터를 도둑질을 하게 된다. 결국 둘의 행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경찰에 잡히게 되는데, 트루디의 기지로 브랜단은 실형을 면하게 되고 자신만 교도소를 가게 된다. 나중에 교도소 면회실에서 브랜단이 사랑하는 트루디를 위해 '생명의 양식'을 사랑의 아리아처럼 끝까지 부르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사실 교도소 면회실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결국 그곳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가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동료죄수들과 면회 온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소심한 브랜단으로 하여금 절도행각에 함께 가담하게 되고, 교도소 면회실에서 노래도 부르게 만드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브랜단의 사랑에 트루디는 무엇을 했을까. 자세히 보면 한 게 별로 없다. 사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둘 다 조금씩 변해하게 되어 있다. 내내 트루디는 대범하고, 발랄하고 때로 너무 변하지 않으니 이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마지막에 브랜단을 위해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한 건 이들 사랑에 주효했다는 정도?


그런 걸 보면 반반의 사랑은 없는 것 같다. 어느 한쪽이 조금 더 기우는 사랑을 하게 된다. 영화의 경우는 당연 트루디 보다 브랜단이다. 또한 트루디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은데 브랜단만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확실히 뇌의 어떤 화학작용임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엔딩에 에필로그가 코믹하게 그려지는데 브랜단과 트루디가 결국 결혼한다. 하지만 이혼을 하고 다시 재결합을 한다.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브랜단이 트루디화 됐다는 얘기다. 서로 같으면 살 수 없다. 서로 달라야 살 수 있다. 거기엔 권태도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같아서 좋다는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엔 정말 좋아서라기 보단 거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작용하기 때문일 거다. 같으면 발전이 없고 위기의 순간에도 그것을 위기로 느끼지 못해 같이 위험해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서로 다르다 닮기도 하는데 시작부터 같으면 미래에 희망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 둘은 재결합을 한다. 사람은 또 적응하는 동물 아닌가. 브랜단과 트루디의 결합은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나이 들어서일 것이다. 나이 들면 새로 맞추며 산다는 게 귀찮고 싫을 때가 있다. 익숙한 것이 좋다. 또 익숙한 것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재결합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이 들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나 상대에게나 기회를 주는 건 그래서 필요한 것 같다.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이 희생하고 손해 보는 거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더 많이 닮기도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문득 이 영화를 보니 나의 초등학교 때가 생각이 난다. 1학년 땐가? 유난히 산만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에 비해 난 대체로 말수가 없고 조용했다. 담임 선생님이 굳이 그 아이와 나를 짝이 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나를 닮아 좀 얌전해지길 바랐던 거다. 하지만 결과는, 내가 그 아이의 산만함을 닮게 됐다. 물론 난 그 친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대로 흐르듯, 산만한 것이 점잖은 것을 잠식시킨 것이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결과적으로 그 친구도 나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점잖해졌던 것 같다. 즉 선생님은 말은 그렇게 하셨어도 윈윈효과를 노리셨던 거겠지.


P.S: 뭔가 재미있는 영화일 것 같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언젠가 본 영화다. 

다른 영화로 바꿔 볼까 하다가 영화의 엉뚱 발랄함이 이내 잡아 끄는 매력이 있어 그냥 계속 봤다. 소소하고 아기자기하게 볼만한 요소들이 많은 영화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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