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 하늘아래 베이지색 건물들, 연두색 나뭇잎 그리고 센강
뒤늦게 쓰는 어느 여름날의 파리 일기
빛과 낭만, 예술의 도시 파리. 누군가는 인생 최고의 도시로 꼽지만, 또 누군가는 최악의 도시로도 뽑는 그곳.
아름답고 웅장한 에펠탑이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부랑자와 소매치기도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날씨로도 유명하다. 물가는 비싸고 사람들은 깍쟁이들 천지에 가는 곳마다 관광객들이 범람하니 나에게 파리는 그저 일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럽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며 본의 아니게 한 달에 서너번씩 파리를 다녔는데 비행 날이 닥치면 어찌나 가기 싫던지.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했지만 24/7 편의점과 밤 11시까지 하는 헤어샵이 즐비한 서울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파리에서의 일상은 답답하고 느렸다.
어느덧 5월이 됐고, 일주일 전만 해도 경량 패딩을 입고 다녔던 파리의 날씨는 그 명성답게 한순간에 바뀌어 한여름의 어느 날로 나를 이끌었다. 가벼운 민소매 차림으로 외출을 했고 근처에 있는 오페라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 했다.
**sur place ou à emporter? 쒸흐 쁠라스 우 아 엉뽁떼?
for here or to go / 여기서 드시고 가시겠어요, 테이크 아웃 하시겠어요?
보통 점원들이 계산하며 물어보는 말
파리와의 일방적 권태기를 극복하고자 조금이라도 산책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오페라 대로를 걸었다. 운이 따랐던 건지 굉장히 오랜만에 코발트 블루색상의 하늘을 마주했다. 파리에서 이렇게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얼마전만 해도 건조했던 나뭇잎들이 생기를 되찾아 눈이 부실듯 쨍한 초록빛을 뽐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파리의 사람이란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저마다 일광욕을 즐겼다. 항상 회갈빛이었던 센강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며 에메랄드 색처럼 보이는 착시효과 까지 주었다. 너무 덥지도 선선하지도 않은 적당히 따뜻한 날씨에 규칙적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얼어붙었던 감성 어딘가를(이 단어 쓰기 굉장히 싫어하지만) 툭 쳤다. 파리라는 도시에 흠뻑 빠진 사람들에게 약간의 공감이 갔다. 뒤늦게 써보는 그 날의 일기와 혹시나 여름의 파리를 찾는 분이 있으실까 하여 소소하지만 확실한 정보를 나눠드리려 한다
Pont Marie는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 이유는 1.마레지구와 가까워서 2.이 카페 때문.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인 카페는 꽤나 괜찮은 가격에 샴페인과 맥주, 음료를 즐길 수 있다. 혼자와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나도 혼자 자리를 잡고 술 한잔 하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조금 부지런히 움직여 오르세를 지나, 앵발리드(군사 박물관)을 지나 에펠탑으로 걸었다. 물론 중간중간 지하철도 타고. 걸어서 갈만한 거리는 아닌 것 같다. 에펠탑이 비교적 다른 관광지에 비해 떨어져 있어서 하루 일정의 처음이나 끝에 가는게 나름 합리적이다. 베이지빛 건물과 파란하늘, 나무의 조화가 이쁘다. 제일 좋아하는 풍경
대부분의 프랑스 레스토랑에는 런치 menu가 있다. 프랑스에서 menu란 단품메뉴가 아니라 코스 요리를 생각하면 편하다. 소르본 대학가나 생미셸 먹자골목에 가면 12~15유로의 저렴한 가격으로 엉트레-쁠라-디저트의 코스요리를 즐길 수 있다. 빵은 원하면 더 받을 수 있고 팁은 주지 않아도 된다.
**물이 필요하면 carafe d'eau(꺄하프 도 / 병에 들어있는 수돗물)를 요청할 수 있는데 무료이다. 꺄하프도를 요청하는 것은 진상이나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 프랑스인도 늘상 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먼저 꺄하프도 줄까?라며 물어보는 웨이터들도 많다.
Trocadéro는 에펠탑 전경을 볼 수 있는 샤요궁이 있는 곳으로, 지하철역에서 바로 내리자마자 웅장한 에펠탑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즐비해 있는데 밤이면 에펠탑 야경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오페라나 생미셸에 비하면 가격대는 약간 있지만 크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스테이크 파스타가 질렸다면 메인요리로 Confit de canard(오리 다리) 혹은 Magret de canard(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를 먹어볼 것을 추천한다. 레드와인과 곁들이면 좋다. 가격은 파스타와 소고기 스테이크 그 사이쯤.
관광객이든 파리지앵이든 피크닉을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인 샹드막스 공원.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피크닉 시즌! 이때는 에펠탑이든 센강변이든 작은 공원이든, 햇빛과 샌드위치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샹드마르스 근처에 까르푸city가 있으니 혹시라도 음료나 와인, 간식이 필요하면 들르자. 그 맞은편에 있는 불랑제리 크로와상이 아주 맛있다.(파리에서 제빵하는 친구 피셜, 나는 빵을 별로 안 좋아함.)
그리고 언제나 북적이는 루브르 박물관. 비오는 날에는 우산, 여름에는 얼음물을 파는 잡상인들이 관광객과 실랑이하고 피라미드 앞에서 인생샷을 남기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풍경. 끝이 있나 생각이 들게 하는 긴 입장줄. 반갑게 들려오는 한국말. 저 피라미드 밑에는 루브르 쇼핑몰이 있는데 맥도날드, 스타벅스, 기념품샵 등이 있다.
루브르에서 길만 건너면 있는 그랑팔래. 사진과 같은 조형물이 있어서 기념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이 곳을 찾는 유일한 이유는 이 안에 있는 키츠네 카페에 가기 위해서! 메종 키츠네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핸드폰 케이스, 에코백 등을 판매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스타벅스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아이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몇안되는 파리의 카페! 개인적으로 라떼를 좋아하지 않는데 키츠네 카페 라떼가 참 꼬소하고 맛있다. 친절한 직원분들의 미소는 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정원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붉은 풍차 물랑루즈로 유명한 몽마르트 언덕. 활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몽마르트는 예술가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다.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날씨가 좋으면 파리 전경을 깔끔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올라가는 길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흰색 성당 앞 잔디밭에는 다양한 버스킹 공연과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내가 갈 때마다 항상 하프를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몽마르트에서 하프연주라니, 1유로를 안 주고 배길 수가 없었다. 언덕 꼭대기에는 미디어로 많이 봐서 익숙한 화가들의 거리가 있다. 무작정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달라고 떼쓰는 얌채 화가들도 있으니 정중히 사양할 것. 특별한 레스토랑은 없다. 스타벅스가 있는데 한국인 직원분이 있으니 불어나 영어가 어려운 분들은 쉽게 주문하실 수 있다.
나도 살짝 피크닉! 바질 페스토 파스타샐러드와 바두아, 딸기잼이 들어간 요거트. 다먹고 그냥 쇼핑백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이 나라는 참 분리수거 안해서 편하고 좋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벌써부터 호텔생각이 간절해진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호텔탓에 파리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출발하기로 하고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보쥬 광장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잘은 모르지만 르누아르나 모네처럼)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배경처럼 평화로운 광장이다. 마레지구에서 쇼핑을 하다가 지치면 근처 아모리노에서 젤라또를 사서 보쥬광장으로 오자. 이런 순간을 기대하고 여행을 오는 것 같다.(난 아니지만)
파리는 참 하늘이 이쁜데 여름에는 밤 10시쯤 해가 진다. 어수룩 해가 넘어가는 시간대의 하늘은 핑크 보라 베이지 민트 모두 섞였다. 유럽에서 찍은 풍경 사진들이 유독 잘 나오는 이유가 왠지 하늘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나는 한국 하늘도 좋아.
보쥬광장 바로 앞에 있어서 들어간 카페 위고. 별 기대 없었는데 시켰던 음식은 프렌치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아주 맛있었다. 같이 갔던 언니는 가족들과 다시 한번 더 찾았다는 레스토랑. magret de canard(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를 à point(아 뿌앙/미디움) 으로 시켰는데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cuisson 뀌쏭/스테이크의 굽기
bien cuit 비앙뀌/웰던
à point 아뿌앙/미디움
saignant 쎄녕/레어
고등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왔던 파리는 내게 신선하고 긍정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예술작품들과 동화책에서 봤던 에펠탑을 실제로 보다니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나중에 꼭 이 멋진 도시를 누비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었는데. 막상 그런 삶을 살게 되니 사람 사는 곳 다 똑같구나 싶기도 하고 화려한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도시의 어두운 면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를 멀리하고, 애정도 주지 않고 항상 서울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종종 파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듯 들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내 자신에게 놀란다. 아마도 여름 파리의 한 장면과 고흐의 그림처럼 노란 조명으로 가득 찬 파리의 밤이 그리워서인 것 같다. 이렇게 기록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나중엔 정말 가물가물해질 것 같아 글을 썼다. 이 기록이 첫 번째 글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고, 일단은 해보겠지만 안 되면 안 해보겠습니다!
글쓴이 초록
항상 서울을 그리워 하며 프랑스 거주
전 유럽 항공사 승무원 현재 모 잡지사 신인 에디터
부지런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병아리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