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지하다 Mar 07. 2023

상사한테 따박따박따지네?

이런 거 너무 좋아!!! >_<

암스테르담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 전 브리핑 시간.


직설적인 화법과 수평적인 근무 분위기가 네덜란드 문화라는 건 이제 익히 알지만,

오늘 브리핑은 특히나 재미있었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팽팽한 설전(?)이 사무장과 일반 승무원 사이에서 오고 가고,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를 관전포인트로 지켜보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의 한국인 승무원,

아, 오늘 비행, 비행기 타기도 전부터 흥미진진하네~



오늘 사건의 발단은, 이코노미클래스 총괄인, 손주가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의 아저씨 사무장이 최근 우리 회사에서 발생한 기내 오븐 화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했다.


사무장: "최근 한 비행에서 기내 오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해. 이럴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뭘 해야 하지?"

누군가: "갤리 메인 파워 스위치를 꺼야 해"

사무장: "그건 별 도움이 안돼. 뭘 해야 하지?"

누군가: "백업을 요청하고, 불부터 꺼야지"

누군가: "조종실에도 보고해야지"

다들 트레이닝에서 배운 대로 불티나게 이야기했지만, 사무장은 누구의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무장: "소화기로 오븐을 열고 불을 껐는데도, 불이 안 꺼졌어. 어떡해야 해?"

누군가: "기내에 있는 도끼로 벽에 구멍을 내고 불씨를 찾아내서 꺼야 해."

사무장: "(벌써 몇 번째 무한 반복 중인 말) It doesn't work. What do you do?"


이 쯤되니 모두들 전의를 상실하고 도대체 원하는 대답이 뭔지 들어보자라는 분위기의 침묵이 흘렀다.

사무장은, 소화기로 불을 껐는데도 불이 안 꺼졌을 경우, 오븐 문을 열고 오븐케이지를 빼면 조그만 선풍기처럼 생긴 환풍기 구멍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구멍 안을 조준하여 소화기를 쏘아야 한다고 했다.

(오븐은 비행기에 붙박이처럼 고정이지만, 케이터링 회사에서 음식을 교체할 수 있도록 오븐 문을 열면 오븐케이지를 넣고 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비즈니스클래스 승무원, 편의상 톰이라 하자, 톰이 따지기 시작했다.

"소화기는 수직으로 들고 쏴야 하는데, 오븐 안에서 수직으로 들고 쏠 수 있을 만큼 오븐이 크지 않은데?"


관전포인트 1: 내용만 들으면 따지고 있지만, 따지는 말투는 아니고, 그냥 일상적인 대화의 톤이다.

관전포인트 2: '내가 너의 지식을 고쳐주겠다.' 내지는 '내가 너의 허점을 지적해 보겠다. 다른 승무원들 앞에서 망신 한 번 당해봐라. 움하하' 이런 의도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네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니, 내가 동의하지 않는 지점을 이야기해 볼 테니 잘 듣고 너도 답변을 해달라.' 정도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사무장이 잠시 움찔했지만, 어쨌거나 불씨가 오븐 뒤 환풍기 구멍에서부터 시작된 거라면 소화기를 그곳에 조준하고 쏘아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톰은,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며 다시 잽을 날렸다.


관전포인트 3: 한국인 같으면 대충, 시간 아깝고 손님들 타기 전에 끝내야 할 들도 많은데, 이쯤에서 얼렁뚱땅 동의하는 척 마무리하며 끝낼 수 있지만, 그런 건 없다. 끝까지 이야기한다.

관전포인트 4: 몇 번의 대화가 둘 사이에 더 오고 간다. 토론이 길어지자 나는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다.


나는 이쯤에서 한국에선 볼 수 없을 이런 유니크한 장면을 직관하며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고, 내 옆의 다른 한국인 승무원은 흥미진진해하며 아이패드로 누구의 비행 경력이 더 긴지 찾아보고 있었다고 한다(승률을 계산하고 있었던 거니?). 실제로 톰의 비행 경력이 사무장보다 6년 더 길었다.

더치비행 27년 산과 21년 산의 10분 토론! 아마 우리에게 100분이 있었다면 그들은 100분 토론을 했을 것이다. 이런 수평적인 조직구조에도 불구하고 톰이 마냥 어린 크루였다면 여전히 사무장에게 따질 수 있었을지, 그게 좀 궁금하긴 했다.


이렇게 직장 상사 앞에서,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서 솔직하게 오픈하고 이야기하는 이 문화가 무척 부러웠다. 사무장 또한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멋있었다. 두 사람 다 모두 멋졌기에 둘 다 위너였다.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내가 상사니 무조건 내 말 들어, 혹은 네가 상사여도 내가 이 회사에 너보다 더 오래 있었으니 내가 더 많이 안다, 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던 오늘의 10분 토론. 인상 깊었다.


오늘 배운 최고의 교훈: 소화기는 수직으로 쏘고, 의사소통은 수평적으로 쏠 것!


소문만 무성한 우리나라 메이저급 국내항공사의 의사소통은 어떤 방식일까 궁금했다. 마침 이 비행을 끝내고 인천공항에서 입국심사를 기다리던 줄에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쭉 서있었다. 같은 파란색 계열이지만 유니폼의 채도에서 느껴지는 '진함'의 차이가, 발언의 자유에 대한 그것으로 느껴졌다면 나의 지나친 편견이었을까? 어떤 상사는 땅콩을 어떻게 서빙하는 것이 맞는지, 초특급 상사에게 옳은 말을 했다가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셨던가?



작가의 이전글 안녕 서울촌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