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욕은 너무 식상하니 회사 칭찬 좀 하겠습니다.
큰 대기업에서 직원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의 일부일 뿐이라고... 돈 주는 만큼만 일하고 절대 회사에 애정을 품지 말라는 말을 자주 본다. 내가 6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는, 다닐 때도 비호감이었지만 그만둘 때는 학을 떼면서 나왔기 때문에 나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잘 안다. 심지어 그 회사에서는 비행을 할 때마다 동료들끼리 '누구 룸메이트가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잘렸대', '누가 깜빡하고 Bar cart를 안 잠가서 부사무장에서 일반 크루로 강등당했대' 등의 사내 가십이 섞인 회사 욕이 주요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학을 떼며 나온 그 회사에서와 같은 직종으로 입사한 이 유럽의 한 항공사는,
'나와 내 동기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나는 네덜란드 항공의 24명 중 한 명인 한국인 승무원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실용성을 중시하며 개인의 권리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네덜란드의 특성상, 엄격하고 무슬림 규율에 많은 영향을 받는 나의 전 회사인 중동 베이스 항공사와는 기본 배경 자체가 다르다지만, 아무리 그걸 감안하고 생각하더라도 우리 회사는 미친 것 같다(미친 듯이 좋다!). 그리고 한국인 승무원의 근무 조건이 네덜란드 로컬 크루들보다 더 좋은 것도 같다. 우리는 그들보다 비행을 더 적게 하면서 같은 월급을 받기 때문이다. 보통 항공사들은 비행시간에 따라 '시간당 비행수당'을 지급하기에 비행을 많이 할수록 월급이 더 많아지는 체계이다. 하지만 네덜란드항공은 비행수당을 따로 주지 않고 고정 월급 + 체류지 비용을 받는다. 물론 레이오버 비행을 많이 하면 체류지 용돈도 더 많이 나오니 어떻게 보면 레이오버 비행을 더 많이 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 비행에 소모되는 체력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적게 비행하고 고정월급과 적당한 체류지 비용을 받는 것이 가성비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승무원 기준으로, 우리는 보통 한 달에 두 번을 비행한다. 한 비행은 왕복을 의미하고 그 말인 즉 총 4 섹터를 탄다는 말이다. 많으면 한 달에 세 번까지도 나오지만 그동안 나는 한 달에 비행 세 번을 받은 적은 없다. 유일한 목적지는 암스테르담.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4시간,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12시간이라고 했을 때(러시아가 전쟁을 멈춘다면 비행시간이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여러모로 싫은 그...),
비행 전 브리핑 시간과 비행 후 뒷정리를 하는 시간을 다 합쳐도 나의 한 달 근무 시간은 60시간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는 호주에서 3년을 살았는데, 한 번에 4개의 일자리를 가지고 일주일에 55~80시간을 일했었다. 가장 많이 일했던 주의 기록은 90시간이었다. 주변에서 나 같은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고 할 정도로 돈에 미쳐 일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에 60시간을 일하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 금액으로는 호주에서 더 많이 벌었다. 하지만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을 하면 네덜란드 항공의 시간당 임금이 호주 시급보다 2.4배 정도 더 높다. 호주 시급이 세계 탑급임에도...
우리 회사는 굳이 다른 회사와 비교하지 않아도 근무조건이 좋지만, 호주에서 개처럼 일했던 3년과의 시간과 비교하니 지금 나의 인생의 만족도는 내 35년 인생 통틀어 가장 높다. 특히 한 번 비행을 다녀오면 무조건 법정 휴무인 6일 휴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주로 그것보다 더 길 때가 많아 나는 보통 10~12일 정도를 쉬고 다시 비행을 간다. 그러니 비행 다녀와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중동 항공사에서 일을 할 때는 틈만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녀서 돈을 모으질 못했었다.) 그러므로 내가 한국에 있을 때의 시간은 마치 백수의 삶과도 같다. 이런 좋은 근무조건들을 알음알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10년 간의 역마살을 마치고 한국에 살러 들어온 것이다.
비행 중 업무 강도를 전 항공사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수월하다. 일단 승객 프로파일이 다르다. 중동 항공사에는 비행기를 난생처음 타보고 영어도 한 마디도 못하는 개발 도상국들 외국인 노동자 승객들도 많이 탔고, 코를 찌르는 냄새가 기내에 술렁일 때도 많았다. 서양식 변기를 쓸 줄 몰라 화장실 한 구석 바닥에 소변을 보는 승객들도 있었고, 까다로운 중동의 갑부들은 종종 많은 요구들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겪은 네덜란드 항공 승객들은 주로 잘 먹고 잘 주무신다. 물론 밤비행이라 주로 잠을 자시니 비행이 편한 것도 있다. 요구하는 것도 많이 없고, 무엇보다 화장실을 쓸 줄 모른다던가 하는, 문명화가 덜 된 승객들이 거의 없다. 문명화가 덜 된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승객들은 특이하게도 짐도 더 많이 가지고 타고, 한 가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승무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문명화가 더 된 승객들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럽/한국/일본 승객들은 화장실도 깨끗이 쓴다.
기내식 서비스가 끝나면 우리는 캠핑의자 같은 것을 꺼내서 갤리에 앉아서 책도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정기적으로 화장실 체크라던가, 콜벨 체크 등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얼마 전 비행에선 새 책을 꺼내 무려 130페이지나 읽었다. 해야 할 일을 다 했는데 굳이 사무장이 왔다고 해서 일을 하는 척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책에서 잠시 눈을 떼며 "How is everything?" 하는 정도다. 한 한국 메이저 항공사는 갤리에 있으면 안 되고 계속 캐빈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다 자는데 어두운 캐빈에 있으면 잠이 쏟아지진 않을까?
두 달 동안 네덜란드에서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회사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Justice 문화'를 강조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기만 한다면 회사에서 최대한 이해를 해주겠다'라고 했다. 많은 것이 처벌로 이어지던 전 회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 한 명의 특성을 존중하며, 피드백 면담 시간에도, 고쳐야 할 점보다는, 나의 뛰어난 부분을 위주로만 피드백을 해주어 "내가 혹시 잘 못하는 점에 대해선 지적해 줄 수 없어? 더 발전시킬 수 있게"라고까지 말해야 했다. 너무 잘하기만 하면 마치 분명 뭔가 못하는 것도 있을 거라는 이 마인드, 이런 이야기를 한국인 동기들에게 했더니 '한국은 마냥 칭찬만 받는 문화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대접이 어색해서 그래.'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태어나서 20년 간 한국에서 살았던 게 어쩐지 슬퍼졌다. 트레이닝 동안 3명의 트레이너들은 우리 모두의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주었다. '우쭈쭈, 잘한다 잘한다.' '(그러니 더 잘해라)' 이런 고도의 심리술이었나? 똑똑한 더치들...
아무튼, 한국인 승무원만 만족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현지 네덜란드 크루들도 굉장히 회사에 만족하며 다니는 것 같다. 특히 유럽 다른 항공사에서 일하다가 온 크루들도 많은데 그들도 전 회사를 언급하며 우리 회사가 훨씬 좋다고 한다. 지상직으로 일하다가 승무원이 된 동료들도 있는데 무척 행복해하며 비행하는 걸 보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직 회사 욕을 하는 동료는 만나보지 못했고, 아줌마, 할머니 크루들이 굉장히 많은 걸 보니 만족하며 장기근속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비행 동안 스트레스가 적어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다. 쓸데없는 사내 정치라던가, 회사 욕을 하며 부정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크루도 없다.
그래서 나도 정년까지 비행하며 다니고 싶다...
하지만 어찌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있으랴. 한국인 승무원이 이토록 사랑하는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한국인 승무원은 2년 계약직으로, 재계약이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원인에서인데, 하나는 한국인 승무원은 '한국 노동법'에 따라 고용이 되고, 우리가 2년 넘게 일을 하게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두 번째로, 네덜란드 항공에서는 아시안크루의 정규직 전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지원을 할 때부터 명시된 사항이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계약직에 관한 노동법을 바꾸거나, 우리 회사 노조에서 아시안 크루에게도 정규직을 허용하겠다고 규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렇게 나의 사랑은 2년만 허락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더 열렬히 좋아하고 싶다. 2년 후엔 헤어져야 하는 사이니 만큼...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나 이제 1년 반이 남았을 뿐이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하지만 어쩌면 단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만 즐길 수 있는 회사이기에, 애틋함을 담아 이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고, 더 많은 것을 즐기고 누리고 싶다. 2년이라는 시한부 계약을 아쉬워할 시간에
승객들에게 미소 한 번 더 날릴 수 있는 승무원이고 싶다.
2년 뒤면 KLM 기내에선 내 미소를 보지 못하실 테니...
그러나 혹시 아는가? 내가 만약 네덜란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네덜란드어를 마스터해서
로컬 크루로 다시 입사할 수 있을지? =) Do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