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1. 뒤늦게 특수교육과에 입학했던 나는 올해 임용고시에 합격하였다.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합격여부를 확인하고 가족, 주변 지인들에게 나의 소식을 알렸다. 생각보다 기쁨의 눈물은 많이 나지 않았다.
2. 베이징 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최민정 선수가 10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TV 중계를 보며 마치 내가 쇼트트랙 선수가 된 것 마냥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응원을 하던 나는 그녀의 멋진 경기력에 박수치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최민정 선수가 레이스를 마치고 너무 서럽게 우는 모습이 TV 화면에 등장했다.
"왜 울지? 워낙 실력이 좋은 선수라서 금메달이 따지 못한게 많이 아쉬워서 그런가?"
나와 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너무 기쁜데 동시에 그간의 혹독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상당히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는 최민정 선수를 보며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다음날 인터넷 기사에서 최민정 선수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 준비 과정이 되게 힘들었는데 그 힘든 시간이 은메달이라는 결과로 나와 북받친 것 같다"
3. 남자 피겨 세계랭킹 5위 차준환 선수의 경기무대를 보았다. 초반에 아쉽게도 넘어졌지만 벌떡 일어나 자연스럽게 연기를 이어갔고 피겨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우와~' 소리가 날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감탄과 함께 눈물이 났다. 몇 년 전, 김연아 선수의 환상적인 무대를 봤을 때는 그렇게 울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내 방에서 펑펑 울었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물이 났다.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 수능 준비 2년, 대학공부 4년. 다행히 초수에 합격하여 6년만에 이 대장정의 끝을 볼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 '임용합격'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면서 내 머릿속엔 늘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나는 남들보다 늦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시작했음에도, 아니 내가 원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나를 응원하고 지원해주는 주변의 모든 존재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최종 합격' 이라는 글자를 확인하고 나서는 ‘기쁨’보다 '안도감'이 나를 압도했던 것 같다. 벅찬 감정보다는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번 올림픽 경기들을 보고 유난히 눈물이 많이 났던건, 목표를 향한 그들의 노력, 과정, 결과에 그간의 내모습이 투영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강도나 깊이가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생에 비할수야 없겠지만.
즐거웠던 순간들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모든 과정들을 잘해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좋은 결과값을 보여주기 위해 매순간 온전히 '즐겼다'고만은 할 수 없었던 나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금메달을 위해 피니시라인에 도착할때까지 숨막히게 달리는 쇼트트랙 선수를 보며 1차 시험 전날까지 장특법 한 줄이라도 더 입으로 소리내어 암기하려고 했던 내가 떠올랐고
경기 초반에 넘어졌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기계처럼 완벽해보이는 연기로 경기를 마무리한 피겨 선수를 보며, 새로운 유형의 2차 수업실연 문제가 당황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날정도로 자동화된 수업을 하고 나온 내가 떠올랐다. 수업실연 점수가 나쁘지 않았던 걸 보면 결국 많은 연습량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겨선수의 연기가 훌륭해보였던 것도 비슷한 이유이지 않았을까..
제 3자의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너무 기뻤다. 그리고 미친듯이 눈물이 났다. 이 모습을 부모님 앞에서 보이지 않았던게 다행이다 싶을만큼.
다소 갑작스럽고 이기적이었던 나의 선택을 믿어주고 변덕스런 수험생을 지켜보며 지원해 준 가족들에게 뭉클하다.
충분히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어버려 스테이크 대신 떡볶이를 먹자고 하는 나의 곁에 여전히 남아있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사회에서 만났던 인연들 중 아직 나를 기억해주고 지지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다.
9살이나 많은 큰언니랑 말동무도 해주고 여행도 가주고 늘 빼놓지 않고 끼워주는 착한 대학동기들에게 고맙다.
생각보다 합격의 기쁨은 짧았다.
며칠 전 학교 업무 인수인계를 받고 돌아보니
내 안은 또 다시 새로운 불확실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신규티를 내며 뚝딱거릴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 실전이다. 아주 많이 흔들리게 될 것 같다.
하지만 6년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
최선을 다해 본 사람이라는, 하다보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내 안에 길~게 어쩌면 평생 간직하고 살게 되지 않을까.
내 삶에서 이렇게 잠시나마 나 자신을 칭찬하고 감탄하는 경험을 해본 것에, 마냥 어려웠다고만 느꼈던 나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미화해볼 수 있음에 위안을 얻는다.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나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길.
- 기사내용 및 사진 출처 : https://view.asiae.co.kr/article/202202112305488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