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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Lyn Apr 06. 2020

휴무인 듯 휴직인 듯

휴직 첫날의 흔한 풍경

  휴직 첫날은 공교롭게도 휴무일인 노동자의 날과 겹친 덕분에 아직 휴직한 기분이 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남들 일하는 평일에 빈둥거리는 기쁨을 맘껏 누리게 될 것 같다.


오전 시간을 침대에서 온전히 보낸 후 정오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사실 여태 잠을 잤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직장인 생체리듬이 몸에 가득 배어 있는 덕분에 출근시간 즈음 깊은 잠은 깼으나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선잠을 조금씩 조금씩 몇 번에 나누어 자고 있었다. 아마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다 허리가 아플 때쯤 몸을 일으켜 앉아 시간을 보니 정오가 넘어 있었다.

 

집은 고요했다. 대학생인 동생은 학교에 있을 것이고 엄마는 수영강습 중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집에서 가장 늦게 일어났다. 거실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보니 새삼 내가 이제 가족들이 있는 부산집에서 1년간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멍하니 햇살을 마주하다 걸음을 옮겨 화장실을 잠시 들렀고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잔 마셨다.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러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회사 기숙사에 기거했던 나에게 좁은 기숙사 방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곳은 1평짜리 화장실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나는 입사 후부터 어제까지 회사 기숙사에 기거했다. 회사가 연고지 없는 타지방에 있었던 이유로 평일에는 회사 기숙사에서 살았고 주말에만 부산집에 잠시 머물렀다. 때문에 부산집은 나에게 곧 주말이었고, 휴식이었다. 반면 회사 기숙사는 평일, 출퇴근, 업무, 스트레스를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나는 이제껏 기숙사를 퇴근 후 지친 몸을 씻고 내일의 노동을 위해 잠시 잠을 자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회사도 기숙사를 사원들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성실히 출퇴근하도록 몸을 정비할 수 있는 장소로 제공했을 것이기에 양자의 이해가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기숙사와 부산집은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요일에 따라 확연히 사용목적이 달랐기에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도 많이 달랐다.


“꿀꺽꿀꺽”


주방에서 물을 한 잔 가득 마신 후 거실로 돌아온 나는 따뜻한 햇살을 온몸 가득 느끼고자 거실 창문에 바짝 붙어 드러누웠다. 그리고 한 삼십 여분 햇살을 가득 받은 후 얼굴이 조금 화끈화끈해지자 햇볕이 미치지 않는 주방 쪽으로 데구루루 천천히 몸을 굴렸다. 거실과 마주 보고 있는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에 부딪힐 때까지 한껏 굴러갔다. 기분이 좋았다. 최근 전혀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이었다. 얼굴에선 배시시 미소가 났다.


“당분간 회사 안 간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 행복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거실의 양쪽 끝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데굴데굴 구르다 보니 배가 조금씩 고파졌다. 냉동고를 열어 1인분씩 소분해놓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우고 냉장고를 열어 보이는 반찬통을 모두 꺼냈다. 나물이 몇 가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양푼이에 나물을 조금씩 덜어 담았고 밥과 참기름 한 스푼을 추가했다. 그리고는 아침에 엄마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한 그릇 담아내어 식탁에 앉았다. 밥상은 콩나물국에 나물 4가지가 들어간 비빔밥으로 차려졌다. 나물잔치였다. 휴직 시작 첫날 첫 끼 식사부터 건강식으로 시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간 아팠던 몸들이 건강식으로 조금이나마 영양을 보충하길 바랐다.


그렇게 나만의 나물잔치상을 30여 분간 천천히 즐긴 후 싱크대로 그릇을 모두 옮기고 밥풀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담은 뒤 문득 핸드폰이 궁금해져 방으로 들어갔다. 폰에는 답이 필요한 연락이 없었고 몇몇 광고성 스팸 문자만 들어와 있었다. 다시 폰을 책상 위로 멀리 던져놓고서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엄마가 그리도 하지 말라고 매번 잔소리하는 식사 후 바로 눕기를 시작했다. 배가 불러 노곤해진 것인지 아님 다시 피곤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스르륵 잠이 다시 들었다.


다시 잠을 깼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아마도 서너 시간을 잔 듯했다. 엄마는 두부조림을 하고 있었고 다소 부은 얼굴로 주방으로 나온 나에게 ‘밥 먹을래?’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조금 더부룩한 뱃속에 다시 밥을 넣었다. 잡곡밥에 두부, 생선, 나물반찬은 살도 안 찔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 후에는 거실에서 엄마와 같이 저녁 일일연속극을 봤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가족 간 불화, 불치병 등 익숙하고 진부한 소재가 가득했지만 꽤 재미났다. 아마도 내일 저녁도 별일 없음 엄마랑 드라마를 같이 시청할 것 같았다.


그렇게 휴직 첫날을 보냈다. 배가 불렀고 잠을 많이 잤다. 정신은 다소 멍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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