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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Lyn Apr 13. 2020

휴직 가이드북은 없네요 (1)

휴직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휴직을 시작하며 우선 한 달은 그냥 집에서 푹 쉬면서 책이나 실컷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날씨 좋은 날이면 그렇게도 밖으로 뛰쳐나가 전망 좋은 카페나 공원으로 소풍을 가고 싶었는데 막상 언제든 그것들을 할 수 있게 되자 이전처럼 간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급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몸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자고 건강식으로 세끼를 잘 챙겨 먹으며, 그간 사기만 하고 읽지 않아 책장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왔던 책들을 읽었다. 하루에 한 권씩 이 주일 간 십여 권이 넘는 책을 읽어냈다. 매일 머리를 쥐어짜고 무언가를 악착같이 끄집어내는 생활만 하다 머리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기분이 꽤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 몸이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이주일을 보내고 나자 앞으로 내게 주어진 1년의 휴직기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최소 한 달 정도는 마음껏 책을 읽고 잠을 자기로 마음먹었음에도 이주일 정도가 지나자 휴직기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벌써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 바닥을 치고 몸 구석구석이 병든 후 어렵게 가진 휴직기간이기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처럼 아주 잘 보내야 한다는 무의식 중의 강박이 나를 이제 그만 쉬게 하고 고민하도록 등 떠민 것 같았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이렇게 훅 지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도 컸다. 


그리하여 휴직기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무엇을 하고자 계획 있게 휴직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참조할 만한 사례나 휴직 후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될 때 가장 쉽고 빠르게 정보를 취하고 내가 할 행동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지나간 길을 참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검색창에 '휴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리서치해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검색 결과는 육아휴직 생활기를 보여주었고 가끔씩 회사 내 리프레쉬 제도나 장기 휴가를 통해 해외 어학연수 및 세계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휴직보다는 퇴사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만큼 한국 직장 문화에서 휴직은 쉽지 않았다.




휴직 전, 회사 동료는 휴직기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 했다. 정년이 보장되고 육아를 위해 근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기에 직장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어 여자에게는 최고의 직장이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는 전문 자격증 공부를 하라 했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사기업에 다니는 우리가 마련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노후대비는 고급 자격증 취득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들 지금이 공부하기에 최적의 시기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지 않았고, 돌봐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년간 직장생활을 했던 덕분에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재원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고민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회계사 친구와 변호사 친구에게 각각 시험 준비과정과 현재 생활이 어떤지, 현재 생활에 만족하는지 등을 물었다. 그들은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고 각 생활에 나름 만족하는 것 같았지만 업무량이 많은 점은 힘들다고 했다. 분명 고액 연봉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전문직으로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점 등은 큰 매력이긴 했으나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이 내 체력과 시간을 보다 많이 투입해 보다 높은 월급을 받는 '고임금 노동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구들처럼 평균 3년이 소요되는 장기간의 시험 준비 기간을 끝까지 견뎌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설령 행운까지 도와줘 그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하더라도 잦은 야근과 함께 치열하게 일하며 사는 삶을 버텨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나는 공부하고픈 의욕도 에너지도 없었다.


또한 내가 회사에 다니는 동안 가장 불만이었거나 우려했던 부분이 고용 안정성이나 사회적 지위의 부족함은 아니었다. 물론 경기불황으로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매년 감소해 정리해고의 위험은 항상 있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나의 정년이 보장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공무원이나 전문직은 분명 좋은 직업이긴 했지만 내가 갖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특히나 업무를 하면서 각 관공서의 공무원들로부터 받은 인상이 나빴던 것도 한몫했다. 나에게 직장은 더 이상 월급을 위해 무엇이든 포기해야 하는 곳이 아니길 바랐다.  


물론 나도 예전에는 직장이란 무릇 돈 버는 곳이므로 직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소비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나의 노동과 시간을 월급으로 바꿔가는 곳으로 인식했다. 때문에 퇴근 이후의 삶, 6시 이후의 삶, 주말의 삶에 집중하고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고자 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다시 평일 직장생활의 연료로 사용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직장에서의 시간이 퇴근 이후와 주말의 삶도 갉아먹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정신과 몸이 병들었기에 더 이상 직장을 돈 버는 장소로만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나는 놀랍게도 업으로 삼고 싶은 것이 그다지 없었다. 사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선택지 중에 고르려고 하니 머리가 멍했다. 그리고 여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때마침 오랜만에 카톡이 온 미국인 친구에게 이같은 내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디어를 구했다. 친구는 "네가 뭘 좋아하는지 여태 모른단 말이야?"라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서는 내가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물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했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으며 운동을 할 때 상쾌함을 느꼈다. 또한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네가 기분 좋아지는 일을 우선 해봐.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고 에너지가 좋아져서 네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랬다. 그즈음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에너지가 너무 없었다. 때문에 건강할 때의 나라면 이것저것 배우고 싶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게다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서운했던 일, 화가 났던 일, 피해봤던 일 등이 이따금씩 생각이 나 심리상태도 불안정했다. 그래서 친구의 조언대로 우선 내 에너지를 충족시키는 일, 기분이 좋아지는 일부터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요가를 끊었고 서점에 가서 신작을 구경하고 한참 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멀리 사는 여동생까지 불러 가족 모두가 다 같이 가까운 포항으로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지인들과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하나씩 해보기 시작하니 놀랍게도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부정적이고 어두운 에너지가 걷히고 밝은 에너지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주말이 지나자 그 친구는 내게 기분 좋아지는 일들을 실행해 보았는지를 체크하며 영상 파일을 하나 보내주었다.  


-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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