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가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휠체어라는 낯선 물건과 몸이 불편한 이 손님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호칭은 ‘손님’이었다. 앉아 있었지만 딱 봐도 키 큰 손님이었다. 다리가 길고 말투는 위 지방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옷을 고르는 그녀. 어떤 옷을 권할 수도 없었으며 딱히 주고받을 말도 없었다. 옷을 입어보지 않고 (몸이 불편하니 입어 볼 수가 없다) 이것저것 그냥 눈으로만 보고 골랐다. 내가 거들어 줄 것 없이 본인이 알아서 잘 고르며 수월하게 옷을 사 갔다. 그리고 거의 교환도 가져오는 일이 없는 옷을 정말 좋아하는 손님이었다. 가게에 와서 그녀를 보게 되는 손님들은 우리와 다른 그녀의 모습과 앉아있는 그녀가 다양한 옷을 사가는 모습을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일어서서 몇 발짝씩 걷기도 했다. 그녀는 우리 가게에 오면 오래 머물렀다. 옷가게를 시작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머무르는 손님은 처음이라 서먹했다.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내 성격이 먼저 선뜻 다가가는 성격이 아닌 탓인지 친해지기가 힘들었다. 어떤 날은 그녀가 계속 같이 있었는데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다. 다른 손님도 없고 어색함이 싫어서 그녀를 혼자 있으라 하고 잠시 옆 가게에 가기도 했다. 그 일은 두고두고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되는 나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언제부터인가 가까워졌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몸이 왜 불편해졌는지를 물어볼 수가 있었는데 후천적인 신경마비였다고 한다. 그전에는 아주 건강하고 운동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키 크고 비율이 좋아서 옷발도 잘 받는 젊은 여자였다. 대학 시절에는 단골 옷가게에 피팅 모델 못지않은 몸매를 자랑했다고 한다. 딱 봐도 그랬을 것 같이 보였다. 그렇게 옷을 좋아하고 예쁘게 입고 다녔던 사람이 갑자기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을 때는 어땠을까? 보통 이상의 정신력이 아니고선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남편 직장이 옮겨오면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낯선 도시에서 친구나 지인이 없었던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 보니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있었다. 이사 와서 어딘가 다니기도 하고, 누군가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상가 안 많은 옷가게 중에 우리 가게를 찜하였나 보다. 많은 옷가게 중에서 우리 가게를 오게 된 것은 ‘인연’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내게 온 그녀의 이름은 ‘선자’다.
2016년 내 생일에 선자가 만들어 준 쿠션 커버이다.
‘선자’는 손재주가 좋았다. 솜씨가 좋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어느 날부터 프랑스 자수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친한 몇 명에게 작은 브로치나 소품들을 직접 수를 놓아 만들어 선물을 해주었다. 그리고 내 생일에는 직접 수를 놓은 쿠션 커버를 만들어 빵빵한 쿠션을 선물로 주었다. 쿠션을 주문하고 커버를 씌워서 부피 큰 쿠션을 몸에 싣고 열심히 휠체어를 밀고 가게로 왔다. 무겁지 않아서 건강한 우리에게는 쿠션 두 개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직접 밀고 다니는 휠체어를 타는 그녀에게는 짐을 안고 휠체어를 밀고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해 주는 것에 비해 선자가 나에게 해주는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나를 더 배려해주었으며 늘 나의 편인 사람이었다. 입이 무거워서 말이 샐까 걱정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받은 사건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물론 나와 친한 사이인 사람은 누구라도 나의 편이겠지만 그녀는 나의 그런 투정 같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이런 그녀가 며칠 발길이 뜸하면 기다려지기도 했다.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어서 안부를 물으며 신경이 쓰였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그녀는 외출을 못한다. 얼마나 갑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발목만 삐끗해도 한동안 정말 불편해하면서 지내는데 그녀가 이렇게 씩씩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보면서 느낀 것은 '비록 몸은 장애가 있지만 정신은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장사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신체는 건강하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가게라는 곳은 늘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오픈 공간이어야 하고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내 마음도 열려 있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의 휠체어는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다른 손님이 한 사람만 더 들어와도 전신 거울을 보기가 불편했다. 이런 경우가 반복될 때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또 한편으론 그녀가 옷을 잘 사는 단골손님이라 좋았다.
가게에 자주 머무르다 보니 퇴근 후에 방문하던 동생 둘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기도 했다. 몇 명이 힘을 모아 몸이 자유롭지 못한 그녀를 차에 태우고 집 근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식사를 하러 가기도 했으며 좋은 계절에는 야외로 꽃구경을 가기도 했었다. 그녀에게 봉사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내 주변에 있는 친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한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녀에게 내가 보고 느낀 좋은 것을 공유하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녀도 행복해했으며 더불어 내 마음도 흐뭇한 일이었다. 결코 나 혼자서는 못할 일이었다. 선임이 순이 함께해준 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함께해서 즐거웠던 지난 추억의 한 장면이다.
2017년 선자와 동생들과 함께 했던 날
그녀는 빈손으로 오는 적이 거의 없었다. 늘 간식을 사 오고 같이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게에 필요한 것이 있는 것을 눈여겨봐 두었다가 그것을 사 오기도 했다. 다리가 건강한 내가 게을러서 미루고 있던 것을 그녀가 챙겨주는 것이었다. 나에게 늘 잘해주는 동생이어서 받은 것이 참 많다. 이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남편은 다시 직장 때문에 올라가고 혼자 남았다. 주말부부로 지내게 된 이후에는 주로 저녁 시간에 가게로 오는 날이 잦아졌다. 내가 자주 늦게까지 상가에 혼자 남아있는 것이 신경 쓰인다고 같이 퇴근할 때도 많았다. 꼭 옷을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반길 수 있는데 너무 오랜 시간 함께 보내야 할 때는 눈치를 줄 수가 없었다. 나 혼자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가 '불편한 몸' 때문이라고 오해를 할까 봐 말을 못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것을 잘 알기에 상처 받을 수도 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말을 못 했을 것이다.
나는 7년 동안 머물렀던 상가 안에서 이사를 나왔다.
“언니~ 짐을 뺀 슈가를 보고 돌아오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이사 와서 처음으로 알게 된 슈가의 공간.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고 행복한 힐링의 장소였는데.
또 다른 슈가에서도 언니의 좋은 기운을 모두에게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세요.
이전처럼 자주 뵙지 못해도 늘 언니가 그립고 보고 싶을 거예요.
오픈 때까지 체력 분배 잘하시고 오픈한 슈가에서 뵐게요.”
이날도 그녀는 어딘가로 외출을 나왔다가 비어있는 우리 가게를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가 보내온 문자를 받고 나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새 가게 이전 선물로 스팀다리미를 배달시켰다. 다리미가 고장 났는데 이사하면 사려고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그녀의 집에서 꽤 먼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휠체어를 타고 이곳까지 벌써 몇 번을 방문해 주었다. 올 때는 언제 샀는지 제과점에 들러서 내가 좋아하는 찹쌀떡이나 브라우니, 마카롱 등을 잊지 않고 사 온다. 휠체어 뒤에 걸고 다니는 장바구니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서 나에게 게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뭣이라고 이 먼 곳까지.’ 이전 가게보다 공간이 넓어서 편하게 앉아있을 수는 있지만 돌아갈 길이 너무 멀었다. 교통약자 콜을 불러서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날씨가 좋을 때는 제법 먼 길을 휠체어를 밀며 가기도 했는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그 먼 곳을 어떻게 다시 돌아가나 마음이 짠해졌다.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이전의 좁은 가게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불편해했던 것들이 미안해졌다.
지금은 그녀도 예전에 내가 있었던 상가 안 새로운 옷가게에 단골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