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결혼예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롱올립 Nov 10. 2020

여전히 알아가는 중입니다.

  안녕 남편. 최근 몇 달 동안 자주 오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어.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아서 당신에게 편지 한 장 쓰는 것이 어찌나 내키지 않던지. 가장 기분이 좋을 때에 건강한 몸 컨디션으로 좋은 기운을 담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문제는 그런 타이밍이 쉽게 오질 않더라.


  출산을 며칠 앞둔 지금에서야 몸도 마음도 비로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된 것 같아.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단어와 문장을 골라가며 차분히 글을 쓸 여유가 이제야 생겼어. 우리 아기를 품고 난 후로 처음 쓰는 편지니까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을 듬뿍 담아 쓰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늦가을의 끝자락에 불어오는 따뜻한 겨울 기운에 힘이 났어. 너무 오랜만에 써주는 편지라 미안해, 남편.


  매일 밤 곤히 잠든 당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해. 이렇게 멋진 사람이랑 결혼해서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머리칼 새하얀 할머니가 되고 오빠가 지금보다 조금 느릿느릿한 할아버지가 될 때를 상상하면 앞으로 변해갈 우리의 모습이 기대도 되고 또 걱정도 되. 이제 며칠 있으면 태어날 우리 아기와 함께 할 가족의 새로운 모습이 어떨지도 무척 궁금하고. 뭐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겠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즐겁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거야.


  그럼에도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가 있어. 그럴 때에 나는 그저 짧고 굵은 마음속 다짐을 하는 걸로 황급히 생각을 마무리 짓곤 해. 약속할 수 있는 건 내 마음가짐밖에 없으니, 우리를 이끄는 많은 삶의 변수들 앞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으로 오빠에게 든든한 한 편이 되어 주리라.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내가 오빠를 잘 보살펴 주리라. 이런 식상한 다짐들 말이야, 오글거리지?


  지난번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나눴던 얘기 기억해? 결혼한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알아가는게 좋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너무 듣기 좋더라. 나는 나의 첫 직장에서 얻은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때 오빠는 담담하게 소주를 들이키면서 내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고, 떠올리면 창피하고 스스로가 안쓰러운 그런 기억이 있다고 말했지. 결은 다르지만 실은 우리가 비슷한 길을 걸어 왔고 그래서 나는 네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안다고.


  그 때 참 멋지더라, 오빠. 처음으로 오빠에게 반했던 순간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았어. 오빠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렇게 간결하고 꾸미지 않은 어조로 내 말에 공감해 주는 당신의 따뜻한 눈빛을 봤을 때 였거든. 시간은 조금 흘렀지만 오빠는 여전히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나를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는 듬직한 사람이더라.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너무 소중한 추억들인데 그런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왜 잊고 살았던 걸까? 좋은 기억들은 너무 쉽게 잊히고 나쁜 기억들만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겨둔 이유는 뭘까? 당분간은 지금처럼 서로가 하나 둘, 먼지 쌓인 옛 추억을 꺼내어 놓는 날들이 스치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서 더 이상 들려줄 옛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을 때가 올 거야. 그 때부터는 우리가 함께하기 시작한 날들의 이야기를 하자.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고이 접어서 마음 한 켠에 소중히 묻어 두고, 우리 아기와 함께 새로 쌓아 올린 새로운 날들의 기억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자.


  돌이켜보니 오빠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어. 내 옆에서 매일 하루하루를 함께 하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실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누가 물으면, ‘내 남편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 있게 안다고 대답할 수 없겠더라. 방귀를 트고, 트림을 하고, 서로의 은밀한 습관들을 들키면서 알아가는 건 그저 우리의 피상적인 행동양식 이었어. 과연 그런 것들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대답일까? 오빠의 마음에 대해서, 살면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과 느낌들에 대해서, 오히려 그런 것들을 늘 궁금해 하고 살펴봐야 하는데, 그냥 잘 해낼 거라고, 오늘 하루도 잘 지내다 올 거라고, 다들 조금씩은 힘드니까 그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쉽게 넘겨 짚곤 했던 무관심함이 오빠를 외롭게 만든 건 아닌지. 미안해, 오빠.


  당신은 언제 외로운 지, 언제 불안한지, 그 불안을 어떻게 떨쳐 버리는지, 여전히 그 불안이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지.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신은 또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지금 현재 당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신은 요즘 행복한지, 불행한지, 몸과 마음이 건강한지, 답답한 건 없는지.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오빠에게 물어 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네. 그간 왜 이런 질문들을 못해준 걸까? 질문이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다면, 걱정 마.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니까. 내 역할은 그저 물어봐 주고, 궁금해하는 데까지 일 거야. 마음이 내키면 속 얘기를 털어 놓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그냥 지나가도 좋아. 그저 오빠의 마음이 언제나 평화롭기를, 그 마음속에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기를, 늘 행복과 희망으로 가득 차 넘치기를 묵묵히 응원할 뿐이야.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어도 서로의 모든 문제와 고민을 한순간에 해결 해 줄 수는 없을 거야. 각자의 불안을 공감하고 이해할 순 있지만, 그 불안을 종식시키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책임져야할 일이겠지.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잖아. 내 인생을 오빠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오빠의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이야. 인생에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아서 아쉽고 서운해.


  그래도 나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 지금보다 좀 더 많은 대화가 있었으면 해. 여름날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 놓고, 가을엔 붉은 빛 와인 한 잔, 겨울엔 오빠가 좋아하는 맑은 소주 한잔씩 곁들이면서, 지난번처럼 은밀하고 사소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재잘거릴 수 있는 시간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비록 영영 가 닿을 수 없을 지라도, 서로의 모습을 계속 궁금해 하고 예쁘게 여기면서 보듬고 토닥거리는 날들이 쌓여 가기를.


  여전히 알아갈 것이 많은 우리는 함께 기울일 술 잔도, 함께 찾아 헤맬 맛집도, 친구들도, 남겨둘 사진도 많겠지. 남들이 너희 부부는 뭐 하느라 맨날 바쁘냐고, 주말마다 어딜 그리 쏘다니는 거냐고 물을지 몰라. 그럼 이렇게 대답해 보는 건 어때? ‘나 요즘 썸타잖아. 데이트 하느라고 좀 바빠.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갈게 많거든.'


그렇게 우리 바쁘게 살면서

서로의 미스터리를 발견하고 알아채면서 살자. 그런 소소한 기쁨으로

오늘 하루도 잘 살아보자. 사랑해, 나의 귀여운 남편! 나중에 봐.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기도합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