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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18. 2020

여보, 기도합시다.

  안녕, 남편. 나야. 우리가 죽다 살아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꼭 다짐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써. 2주 전쯤인가 아마? 당신이 서울로 당일치기 출장을 가는데 내가 심심하다고 따라 나섰던 날 기억나? 난 그 때 우리 둘 다 목숨을 하늘에 빚졌다고 생각해. 다시 떠올려 봐도 정말 아찔하다. 사실 하루만에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쉬지 않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미친 일정을 짠 것부터가 위험한 판단이었어. 내가 오빠에게 완강히 대구에서 하루밤을 자고 다음 날 움직이자고 말했어야 했나봐. 그때는 ‘어차피 피곤할 거 그냥 끝까지 피곤하고 다음날 늘어지게 늦잠을 자자’고 생각했는데 우리 둘 다 참 어리석었다.  
 
  다시는 무리해서 당일치기로 장거리운전은 하지 말자. 이미 대구에서 우리집으로 출발할 때 시각이 내 기억으로는 밤 11시였던 것 같은데, 그 땐 사람이 운전대를 잡을 것이 아니라 잠을 자야 하는 시각이야. 우리 둘 다 아직 최선의 선택을 현명하게 내리는 데에 판단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 다음부터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의논해 보자. 나는 오빠의 말에, 오빠는 나의 말에 좀 더 마음을 열어보자. 스티브, 아무튼 그 날 정말 큰 일이 날 뻔 했어. “아, 나 졸았다!”라는 당신의 말에 나도 잠깐 잠을 깼는데, 약 20키로를 어떻게 운전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오빠의 말에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오더라. 어쩐지, 그 시각에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운전할 때부터 위험하다 했어. 나는 원래 차만 타면 잠을 자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운전자인 당신이 졸음운전을 하다니! 그건 졸음운전이 아니라 사실 수면운전이었어, 그치? 난 아직도 오빠가 네비게이션으로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서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라고 말하던 장면이 정말 또렷하게 ‘기억이 나’.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무서워진다.

  사실 미안해, 나라도 안 자고 오빠를 옆에서 깨워줬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오빠. 나는 늘 차만 타면 너무 잠이 와. 조수석에 앉아 있을 때면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져. 나도 정말 힘들어.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안 자려고 많이 노력하거든? 그런데 너무 힘들어. 오빠가 운전을 잘 하거나, 우리 차가 너무 좋거나, 오빠말대로 내 의지력이 약해서 그런가봐. 정말 미안한데 난 이 문제에서 만큼은 할 말이 없다. 미안하고 앞으로 노력할게, 일단 노력해 볼게. 겉보기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사자는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정말 치열하게 잠과의 사투를 벌인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 주었으면 좋겠어. 내 변론은 여기까지만 할게. 읽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다시는 무리해서 피곤한데 장거리 운전을 하지 않기로! 우리 서로 약속해. 손가락 걸었다고 생각하고,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 다음이야.

  스티브, 우리 둘 다 제 멋대로의 크리스찬이지만 앞으로는 루틴하게 기도를 하자.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우리가 정말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얘기하면 당신은 또 내가 순수하다며 웃어 넘길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지금 정말 심각해. 진지하게 당신에게 요청하는 거야. 우리 둘 다 교회는 싫으니까, 성당을 가든, 성당을 가기 싫으면 집에서라도, 대신에 매일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각에 두 손 맞잡고 기도를 하자. 주일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늦잠자지 말고 일어나서 기도하러 가자. 일주일에 한 번은 갈 수 있잖아? 와이프가 요청하는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스티브,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빠도 알잖아.

  꼭 이번 기회에 죽다 살아나서 기도를 드리자는게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우리가 서로를 만나게 해주신 것, 우리의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것, 아직 일 할 수 있는 것, 노력하며 살 수 있는 삶을 가진 것에 감사하자. 나는 지금 종교의 명암에 대해 당신과 논쟁을 하자는게 아니야. 그저 ‘감사’에 대해 말하는 거야. 감사할 시간을 마련해 두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 감사를 그냥 저냥 흘려 보내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당신과 내가 종교의 본질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 기억하지? 교회를 가지 않아도, 성당을 가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런데 나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해. 종교인의 기본은 내가 믿는 신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거야. 당신도 알잖아. 우리 지금처럼 제멋대로 살지 말자. 믿지 않는 삶보다는 용기있고 성실하게 믿는 삶을 살자. 우선 나부터 그렇게 해 볼 테니까, 당신도 원하면 나랑 같이 하자.

  다행히 그 날 새벽의 고속도로가 직선으로 곧게 나 있었고, 도로 위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우리 차에 주행보조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었고, 그 주행보조시스템이 놀랍게도 이십키로를 안전하게 운전해 주었고, 끝까지 자지 않고 중간에 둘 중 하나가 깨어나서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었고... 이런 것들을 단순히 행운의 연속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감사한 우연의 연속이었어, 그렇지? 스티브, 우리 진심으로 감사하자.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기도하는 삶을 살자.

오늘도 화이팅하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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