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민 Dec 18. 2020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틀 너머의 이야기_한수희 작가님

'우리에게 내적인 삶이 없다면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외적인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러니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삶의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인 삶이 얼마나 견고한지에 달려 있을 거라 믿고 싶다.' 


'베스트셀러에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아니다. 적개심까지는 아니다. 남들 다 읽는 책을 나까지 읽어줘야 하나, 싶어 심통이 날 뿐이다.'


'사소하게 싫은 몇 개가 마치 장롱 뒤의 먼지처럼 조금씩 조금식 쌓여가고 커다란 먼지뭉치가 된다. 그렇게 청소기로 빨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미움이 커진다. -마스다 미리, <<아무래도 싫은 사람>> 중에서-'


'앞으로는 미움 없이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사랑도 미움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작은 위로나 힘이 될 만한 것은 겨우 이런 이야기, 이렇게나 지당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 방들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른이었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삶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부동산 계약서를 작성하고 전입신고를 하는 일부터 매 끼니를 챙겨 먹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형광등을 갈고 곰팡이를 제거하는 일, 월세와 전기요금과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제때 납부하는 일, 도둑이 들었을 때 경찰에 신고하고 보일러가 터졌을 때 집주인과 싸우는 일.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몫이었다.'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걸음을 무겁게 하던 막막함과 우울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외로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게 된다.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하는 말 같은 것은 유부녀에게 사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 없이는 못 살던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각종 교육기관에 입소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화장실에 가고 혼자 친구 집에 놀러 다닌다. 그제야 덜컥 두려움이 밀려든다. 제발 좀 외로워 보고 싶다고 징징대던 나는,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 그때처럼 외로워질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외로워지겠지. 그때는 잃을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제 나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잃어갈 것이므로.'


'부모님은 더이상 늙은 딸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게 살아나 계시면 다행일 것이다. 친구들은 각자 자기 문제로 바쁠 것이고, 틈만 나면 징징대는 나를 지겨워할 것이다. 세상은 나란 존재를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고 외로운 우리는 먹을 것이다. 먹는 데서 생사라도 걸린 듯 먹을 것이다. 입이 찢어져라 쑤셔 넣고 땀을 뻘뻘 흘리고 "크아, 시원하다!" 소리를 지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것이다. TV를 켜고 출생의 비밀, 부모의 복수로 점철된 주말 드라마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배가 점점 불러와 단추가 잘 안 잠겨도,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당겨도 그 순간만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작고 허름한 우동 가게 주인 할머니는 "발로 반죽을 밟으면 정성이 들어가나요?"라고 묻는 제작진에게 이렇게 답해주었다. "귀여우니까요. 귀여워요. 품을 들이는 만큼 우동이 귀여워지잖아요. 내 입장에서는 자식 같은 것이니까요." 귀여운 우동이라니. 최고로 맛있는 우동이 아니라 그저 귀여워서라니. 매일 반복되는 허무한 일과, 노력해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은 작가 생활에 지쳐 있던 작가는 귀여운 우동을 만드는 할머니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한다. 우선은 써야 한다. 어제와 다름없이 반죽을 치대는 미야가와 할머니처럼 일본 최고의 우동 대신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귀여운 우동을 대접하겠다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지우고 다시 쓰는 끈기만이 초고를 완성시킬 테니까.'


'그래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사려 깊은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기댈 구석이 되어주는 사람이, 그럼에도 적절한 거리를 지켜줄 줄 아는 예의 있는 사람이 된다. 선량한 마음이 된다.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이 일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론이란 카페나 술집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 인생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인생론은 말보다는 실천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인생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대로 하나의 인생론이 되어버리는 그런 인생, 그런 인생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치바나 다카시, <<청춘표류>> 중에서-'


'꼼꼼하게 다림질을 하고,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적당하게 간을 하여 스파게티 면을 삶는 등 사소한 일상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는 결코 표층적인 것이 아니며 삶의 근본적인 것과 연결됩니다.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중에서-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안도감을 느낀 것 같다.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로 아침을 지어 먹고, 집 안을 청소하고, 다림질을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가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가 이 일상을 정성 들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는 곳이기에, 거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이 일상을 정성 들여,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소용도 없고 결실을 맺게 될지 아닐지 모를 일. 그런다고 세상이 털끝 하나 달라질 것 같으냐는 소리나 듣기 딱 좋은 일. 하지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좋아하는 마음은 씩씩하게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왜 좋아하는지를 자신의 지성과 관점과 삶으로 풀어내는 자세가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아하는 마음조차 그의 고유한 개성과 자산이 되어버린다. 바람직한 팬이란 이런 것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은,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큰 일인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 나보다 더 큰 존재를 좋아하고 갈망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매 순간이 패배와 좌절의 연속이다. 그런데 실은 그 패배감과 좌절감이 우리라는 존재를 조금씩 이룩해 나간다. 기쁨은 승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패배에서도 온다는 사실을, 무언가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또 갈구한 사람들은 아는 것만 같다.'


'결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만다가 물었을 때, 테오도르의 답은 이렇다. 사랑에 빠진 어린 남녀가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자유롭고 스릴 넘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성장하는 것. 서로를 겁먹게 하지 않으면서 변화하고 삶을 공유하는 것."'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일수록 할 말이 더 많은 법이래.' '무척 다정하게 들렸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좋은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면,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아줄 때면 사람은 겸손해진다. 곁에 누가 있어서 내 손을 잡아준다는 이 현실이 고맙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아서, 가끔 힘을 주어 꽉 쥐어주어서 고맙다.'


'기품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황인숙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움츠러들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젠체하지 않는 것도 내면의 간결한 자기 긍정 없이는 힘들다.'


'나는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내 평생 '예쁨'에 관한 언급을 딱 두 번 받았는데 그 횟수가 희소한 만큼 생생히 기억한다. 한 번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였는데 그 애야말로 정말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예뻤다. 향기가 날 듯 뽀얬다. 스물 다섯 살 난 여선생님이 선망에 찬 목소리로 "승혜는 나날이 피어나는구나!" 탄식하는 게 귀에 선하다. 그 애의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 그 애가 쉬는 시간에 달려와 무슨 큰 선물이라도 감춘 듯한 환한 얼굴로 할 말이 있다며 내 손을 끌고 갔다. 그 애는 큰 비밀이나 되는 듯 내게 속삭였다. '너 크면 미인이 될 거 같애. 어제 우리 엄마 학부형이 왔었는데 굉장히 미인이다! 근데 너랑 비슷하게 생겼어." 나는 조금 기쁘고 조금 수모를 당한 기분이었다. 또 한 번은 이제도저제도 미인이 되지 못한 채 서른다섯 살이 된 다음이었다. 한 출판사의 술자리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어렸을 때 예뻤을 것 같다고 한, 그 한마디를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어렸을 때는 미래를 몰랐지만 난 이제 과거를 알고 있다. -황인숙 <<인숙만필>>중에서-


'단지 내가 너를 만들고 낳았다고 해서, 핏줄이 이어졌다고 해서 저절로 애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살을 부비고 눈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들이 관계를 만들고 애정을 낳는다. 부모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이다.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이렇게나 시시하고 아득한 일상의 연속이다. 그렇게 시시하고 아득한 일상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되어간다.'


'평범하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두 모자는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거대한 것들에 대해서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