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부조리.

[전락]

by 묭롶

<전락>을 읽고 카뮈에 대해 정립되었던 나의 생각들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방인>과 <페스트>와 이 책 사이에는 아시아와 미주대륙만큼의 거리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방인>과 <페스트>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의 인간을 논했다면, 이 작품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조리로부터 출발한다.


기존 작품이 사회가 부여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나'사이의 괴리감을 표현했다면 <전락>은 바로 자신이 인식하는 '나'를 부정하는 '나'와의 괴리감을 의미한다. 같은 사유의 우물에서 건져 올려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우물에서 길러진 물처럼 <전락>은 문체도 전개 방식과 사유가 그전의 흐름과는 분리된 새로운 창작물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연극 대본의 독백 부분만을 모아둔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 눈앞에서 작중 인물 클라망스가 재판관 겸 참회자로서 변론과 판정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분명히 난 방청석에 있었는데, 어느샌가 책의 말미에서 클라망스의 변론이 끝날 즈음, 이번엔 재판관이 된 클라망스 앞에 죄 인석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맛보는 최대의 고통은

율법도 없는 가운데 심판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쎄 우리는 바로

그런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겁니다.

원래 갖추고 있어야 할 고삐를 잃어버린 재판관들은

닥치는 대로 날뛰면서 마구 해치우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선포합니다.

요컨대 나는 재판관 겸 참회자다 이겁니다.」 p121


「오늘 저녁처럼 그 초상화가 다 만들어지면

나는 그것을 쳐들어 보이며 비탄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 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그때 나는 이야기 도중에 슬그머니 '나'라는 말을 '우리'라는 말로 바꿔치기합니다.

그리하여 "이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는 대목에 이르면 일은 다 된 셈이어서

나는 그들의 진실을 폭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p141



클라망스의 입을 빌어 나오는 이야기는 안개에 싸여 모든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 암스테르담과 같은 혼란과 막연함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경계가 어느 순간부터는 안갯속의 미로를 헤매는 듯한 불분명함으로 다가오는데, 이러한 감정까지도 클라망스는 자신이 치밀하게 계획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말을 하며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감춘다. 클라망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우리들(죄의식)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구체적 증거가 되어 우리 눈앞에 디밀어지는 순간 우리는 이중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어깨 위로 짓누르는

그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심판을

모든 사람들에게로 골고루 확대하는

어떤 다른 수단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겁니다.

그래 그 수단을 발견했지요.

~우리들을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코페르니쿠스가 한 것처럼 논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 겁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p139



작중 인물 클라망스를 보며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찾으려 했던 초인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과거 서양을 지배했던 형이상학(거대담론, 신)의 자리를 대신할 초인의(창조적이고 새로운 형이상학) 존재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의 초인 사상은 필연적으로 대중 다수보다 뛰어난 인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구습을(독재자나 이름만 바뀐 지배체계)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카뮈는 니체와는 다르게 인간들 모두가 죄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카뮈가 보는 인간은 모두 죄인(참회자)이면서도 타인을 단죄하려는(재판관) 이중적 존재들이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다수의 타인, 즉 죄인인 그들이 이해 목적 하에 만들어 놓은 모든 제도(특히 사법제도)들은 모두 근거 없는 모순투성이일 뿐이다. 하지만 제도권 하에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불합리함을 주장하는 일은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다. 카뮈는 전직 파리의 변호사 출신인 클라망스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우리가 보편적 진리로 믿고 있는 모든 것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합리를 우리 앞에 증거 한다.



「심판을 회피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우리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을 단죄하고

있다는 점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우선 단죄의 대상을 모든 사람들에게로 무차별하게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축복을 해주는 일도 없으며

사면을 베풀어주지도 않습니다.

그저 덧셈만을 해본 다음 "모두 합해서 얼마다.

너는 패륜아다, 색마다, 과장증 환자다, 남색광이다, 예술가다, 또 무엇 무엇이다." 하는 식입니다.

~야! 엉큼한 졸때기들, 희극배우, 위선자 놈들!

그렇지만 동정도 가지지요!


네, 그래요, 정말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다 그렇습니다.」 p133~136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인식하고 살아간다. 자신에게 부여된 판단들은 모두 타인들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 모습이 실제의 자신이라고 인식해버린다. 하지만 모두가 중적 존재인 까닭에 자신이라고 인식해온 나의 모습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한 각성이 클라망스가 어느 날 저녁 들었던 웃음소리의 정체(이중적 자신의 모습을 비웃는 또 하나의 자아)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그날 저녁엔

그 어느 때보다도 오히려 덜 따분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요, 정말이지 난 무슨 일이 일어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심정이 아니었어요.

그랬었는데

글쎄......,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

그건 어느 가을날 저녁이었어요.

~ 웃음소리는 점점 약해졌지만

여전히 내 등 뒤에서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어요.

외출을 할까 어쩔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창문 아래서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물을 한 잔 마시려고 욕실로 갔어요.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은 웃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웃음은 이중으로 어른거리는 것 같더군요......」 P45~47



날 자신을 찾아온 각성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가 이미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의식'은 언제나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한 결과물이기에 항상 죄의식을 느낀 그 순간은 이미 늦어버린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 죄의식은 본인이 애써 잊고 살아가려 해도 강물을 흘러 대양에서 다시 마주친 '검은 물체(죄의식)'처럼 언젠가 의식 속에 그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것을 깨달아버렸기에 클라망스는 자신의 죄의식을 범인류적 죄의식 속에서 희석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밤의 정적 속에서 내 귀에는 엄청나다 싶은,

어떤 몸뚱어리가 물에 철썩 떨어지는 소리였어요. ~달려가고 싶으면서도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추위와 전율로 떨고 있었던 것 같아요.」 p75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대서양 횡단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쇠붙이 색깔이 도는 바다

저 멀리 까만 점 하나가 보이는 거였어요.

~나는 고함을 지르고, 바보처럼 구원을 청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게 다시 나타났어요.

~나는 그걸 태연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순간적으로 어떤 투신자살자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p111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겁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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