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개>: 인종주의를 빌어 자본주의를 고발하다.
내가 로맹 가리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11월 가을이었다. 그 이후로 그의 미발표작이었던 <죽은 자들의 포도주>가 2018년 12월 겨울 출간되기까지 약 6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발표되는 로맹 가리의 작품을 한 권씩 만나왔다. 이 글은 내가 로맹 가리를 만난 그 첫 번째 만남에 관한 글이다.
대부분의 폭탄의 원리는 압축에 의한 폭발 반응이다. 쭈그러진 풍선보다 팽팽하게 공기가 차 있는 풍선이 더 잘 터지는 이치처럼, 한정된 공간 이상으로 채워진 원자나 핵이 융합 반응을 통해 일으키는 팽창된 에너지의 분출이 바로 폭탄의 폭발이다.
시나 소설의 언어는 함축을 통해 그 단어나 글 속에 다양한 함의를 담는다. 폭탄의 원리처럼 함축과 함의를 통해 언어는 독자의 가슴속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조그마한 부피의 원자폭탄이 일본 열도를 초토화시켰던 것처럼, 때로 하나의 단어, 한 줄의 글귀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뀌게 하는 파급력을 갖는 경우도 있다.
66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가 있다. 알베르 카뮈의 미완결작 『행복한 죽음』의 뫼르소가 권총 자살을 꿈꾸며 입 안에 총구를 물고 총신의 차가움과 총구의 냄새를 음미하며 자신의 눈 앞에 직면한 죽음을 감수성의 형태로 느꼈다면, 누구보다 생을 뜨겁게 살았던 로맹 가리는 그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행동으로 옮겼다.
로맹 가리와 알베르 카뮈는 앙드레 말로와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작가이면서 영화나 연극을 연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작품 활동이나 정치참여, 삶의 모습 등에서 큰 차이를 드러냈다. 그들은 순수 혈통의 프랑스인이 아니었기에 프랑스에 속해있으면서도 '이방인' 내지는 '소외자'였다. 소외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불투명한 소속감 속에서 삶의 치열함은 타인과는 다른 시야를 제공했고 그런 그들에게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그 경험을 글로 형상화 한 앙드레 말로의 영향은 지대했다.
「아무리 직업 작가라도 1700만 미국 흑인을 집에 들일 수는 없어.
이 일에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또 한 권의 책일 뿐이야.
~내가 바꿀 수 없고 해결할 수 없고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난 그 문제를 없애버리지. 그걸 한 권의 책 속에 배출해버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억눌린 것처럼 답답하지 않아.
잠도 잘 와. 그러곤 달아나버리지.」 p64
프랑스 문단에서 유일하게 로맹 가리가 인정하는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를 다양한 형태(논문, 사설, 소설, 희곡 등)로 표출함으로써 글로써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와 반면에 로맹 가리는 카뮈와는 다르게 자신이 행동한 신념의 결과물을 글로 표출해냈다. 쉬운 말로 로맹 가리가 법보다 주먹이 앞섰다면, 카뮈는 제도를 통해 악을 응징하고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애썼다는 얘기가 되겠다. 앙드레 말로와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와의 관련성은 차후 시간을 갖고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제 본격적으로 『흰 개』를 얘기해보자. 앞서 문학이 함의를 통해 독자의 가슴에 폭탄과 같은 감수성을 터트린다고 말한 바와 같이 로맹 가리는 '흰 개'라는 단어 속에 1960년대 후반 인종주의로 인한 미국의 시대상을 압축해 놓았다.
「약탈은 '선동 사회'가 구매 수단은 주지 않은 채
온갖 방식으로 구매를 부추길 때 수많은 소비자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구의 대부분을 주변부에 남겨두고 본능적 욕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욕구를 충족하도록 부추기면서 욕구를 충족할
수단은 주지 않은 채 부를 항시 과시하는 사회,
광고와 화려한 진열창과 구미를 돋우는 진열대를 통해
소비와 소유를 부추기는 사회, 풍요와 항구적인 경제적 팽창을 좇는
그런 사회를 나는 '선동 사회'라고 부른다.」 p126
하지만 로맹 가리가 작중 1968년대를 '선동 사회'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선동 사회'라는 명칭 하에 '흰 개'는 보다 더 많은 함의(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등)를 포함하며 1968년대의 미국이 아닌 지금 현재와 미래까지로 그 '흰 개'라는 단어의 폭발력은 확장된다.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아일랜드>가 있다. 이 영화에서 시스템(전산 모니터 화면으로 표현)은 사람들에게 시스템이 각자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언젠가는 아일랜드로 갈 수 있다는 꿈을 주민들에게 심어준다. 하지만 실상은 인공장기의 수요자가 수요를 필요로 하기까지 자신이 복제품으로 사육당하고 있으며 아일랜드로 가는 날이 바로 복제인간이 죽음을 맞는 날이라는 사실을 극 중 인물 이완 맥그리거가 알게 되면서 일으키는 정체성의 혼란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영화의 줄거리이다.
어찌 보면 영화 <아일랜드>의 현실은 로맹 가리가 '선동 사회'라고 명명했던 사회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구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문제는 그 '선동 사회'가 1968년대의 미국이 아닌 자본주의를 채택한 모든 국가들의 정체성을 공통적으로 지칭한다는 데 있다. 그는 작중에서 '선동 사회'는 구매능력이 없는 대중을 끊임없이 소비재로 유혹화고 이를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사회라고 말했다. 이는 자본주의를 채택한 모든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국민에게 구체적인 미래나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언젠가는 이룰 수(영화 아일랜드라는 허상을 주민들에게 심어준 것처럼) 있다는 가짜 미끼를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그 목표에 다가가도록 스스로 채찍질하고 조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목표를 위한 과정에 타인은 경쟁자이며 제거대상이라며 끊임없이 국민을 세뇌하고 조련함으로써,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들은 허상을 쫓기 위해 가차 없이 자신과 같은 처지이거나 더 불우한 사람들을 짓밟게 된다.
우리가 지역감정에 의해 분할되고 농민은 노동자를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생산직은 사무직을 미워하며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흰 개』에서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한 여러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현재의 상태로 고착화시키는 건 바로 백인들이 아니라 흑인들에 의해서이다. 실제 작품 속에서 '마틴 루터 킹'목사는 흑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레드'라는 가상의 인물 또한 자신과는 다른 조직인 흑인 과격단체에 의해 살해된다.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증오가 있는 곳에는 교육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변형이 있었을 뿐이다. 조련 말이다.」 p51
어찌 보면 우리들은 자본주의가 증오라는 이름으로 조련한 또 하나의 '흰 개'일지도 모른다. 조련자에 따라 '흰 개'도 되었다가 '검은 개'도 되었다가 누군가 어느 날 배를 시원하게 긁어주면 과거의 친분관계나 인간으로서의 예의나 기본도 기꺼이 버리고 이빨을 드러내는 '개'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문제는 그렇게 물고 난 이후이다. 경제를 살린다는 2MB가 정권을 잡고, 그 이후 박근혜가 취임하면서 나라꼴이 얼마나 우스워졌으며(일본, 중국 할 것 없이 개나 소나 다 함부로 하고) 우리네 살림살이는 또 얼마나 피폐해졌는가(청년실업 공식만 백만, 하우스 푸어 백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집권층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면 나라를 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이빨을 드러내던 맹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배를 내밀며 긁어주길 바라며 꼬리를 흔들고 있을까. 꼬리 치다 호되게 걷어차이고도 다시 또 조련당하길 원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나는 로맹 가리의 『흰 개』가 예사로이 읽히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