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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May 12. 2024

나의 풍요로운 런던 생활

영국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

한국을 떠나 런던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 차가 되었다. 처음엔 직장도, 친구도 없이 셰어룸을 전전하던 내가, 런던 시내로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고 버젓한 나만의 공간에서 함께 사는 파트너도 생겼고, 종종 안부를 주고받으며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들까지 생겼다. 불과 3년 전과 비교했을 때, 180도 달라진 나의 삶을 바라보면 정말 가끔은 신기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을 때가 많다.


지난주는 문득 런던에 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요롭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좋은 기억들로 가득했다. 남자친구와 같이 살다 보니 웬만한 친구들 약속은 함께 초대를 받는 편인데 그 주는 특별히 각자 서로 다른 친구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은 주간이었다. 금요일은 조의 절친한 친구인 앤디와 그의 여자친구인 로라가 최근에 동거를 시작해서 그걸 축하하는 자리, 토요일은 친한 회사 동료가 새 집으로 이사를 해서 회사 친구들과 함께 축하하는 시간이었다.


앤디와 로라는 우리보다 6개월 정도 먼저 연애를 시작한 친구들인데 조가 나와 같이 살기 전에는 앤디와 함께 살았었다. 그래서 그동안 넷이서 같이 여행도 가고 자주 만나 더블데이트를 할 만큼 친하게 지내는 커플이다. 그리고 작년에 약혼을 한 올리네 커플까지 여섯이서 집들이 모임을 가졌다. 내가 그 친구들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내가 외국인으로서 그룹에서 소외감이 들지 않도록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한 노력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나를 별다른 편견 없이 친구로서 똑같이 대해준다고 할까? 여하튼 그 친구들은 내가 유일하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그룹이고 언제 봐도 유쾌하고 재밌는 친구들이다. 앤디와 로라가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까지 풀 코스로 완벽하게 준비해 줘서 우리는 먹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여섯이서 즐겁게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영국식 모임답게 보드게임을 시작했는데 그게 약간 19금 이어서 서로 십 대 마냥 깔깔거리며 얼마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영국 사람들이 겉으로는 굉장히 점잖은데 한 번 저급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게 정말 영국스럽고 재밌고 웃기다. 마지막에는 다들 알딸딸하게 취해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또 '90년 대생들이 즐겨 듣는 노래'들이어서 나도 공감이 갔다. 다들 요즘 Gen Z들은 이런 명곡들을 모른다며 아쉬워했다. 역시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우리 커플은 웬만하면 밤 11시가 되면 잠자리에 드는 편인데, 그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2시까지 놀다 집에 들어왔다.




프랑시스는 내가 회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 중 한 명이다. 가나에서 온 친구인데 최근에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며 곧 모두를 초대해서 가나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고 정말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파티하기 전 날, "Best of Ghana"라는 타이틀로 직접 만든 초대장과 메뉴를 보내며 즐거워하던 프랑시스가 어찌나 귀엽던지. 그리고 아프리카 음식은 레스토랑에서나 먹어봤지 로컬이 직접 집에서 요리한 음식은 처음이라 정말 설렜다. 그의 집에 도착했더니 세상에, 이걸 대체 누가 다 먹나 싶을 정도의 양의 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아프리카의 문화는 우리와 비슷해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는 음식을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정말 온 마음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고 한다. 덕분에 아침 7시부터 하루종일 요리만 했다는 친구. 그리고 음식은 정말......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이게 바로 홈쿡이구나.

쉐프였던 프랑시스와 전날에 나에게 기대하라며 보내준 메뉴판
가나식 요리 - 치킨 요리, 졸로프 라이스(우리나라로 치면 볶음밥), 커리, 다양한 소스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가나의 파티 문화에서는 예술가들을 초대해 작품 설명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프랑시스의 친구 조세핀은 자신의 최근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직접 작품을 들고 파티에 참석했다. 조세핀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본인의 직업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정말 멋있었다. 그날 파티에 있던 15명가량의 사람들 모두가 진지하게 경청하며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이 나에겐 너무나도 신선했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조세핀과 그녀의 작품들




나의 런던 생활이 풍요로운 이유는 바로 이 '다양성' 때문이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일들이 런던에서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영국인 남자친구 덕분에 현지인들의 삶을 더 가까이 경험하고 또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문화이다. 이보다 더 다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국적, 인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회사 안팎에서 다들 정말 친하게 지내는데, 프랑시스도 그중에 하나이다. 이런 '다양성'은 해외 생활을 하는 데 정말 큰 용기를 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런던의 이 다양성을 정말 사랑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갖고 태어났지만 모두 같은 마음으로 런던에 와서 각자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언어, 문화와 더불어 그들의 깊은 생각까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넓어짐을 느낀다. 가끔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편협했는지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혹여나 주류에 휩쓸려 한국인으로서 내 정체성을 잃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고, 반대로 외로움에 한국 사람들과만 어울리게 되는 것도 사실 경계했었는데 지금 나의 삶은 그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완벽한 발란스를 이루고 있다. 영국인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도 하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회사 동료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가끔은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서 오직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순간들을 맘껏 누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을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힘이 길러졌달까?


풍요로운 나의 런던 생활. 다시 한번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 영국에 오길 정말 잘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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