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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Aug 20. 2024

이제 갓생을 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근 슬럼프가 왔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쓰는 글...) 딱히 엄청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최근에 매니저와 한 퍼포먼스 리뷰가 큰 역할을 했다.


올 1월, 꽤 유의미한 연봉 인상을 얻어냈으니 내년 초쯤에는 시니어로 승진을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올해 상반기도 성과를 꽤 잘 냈다. 클라이언트들에게 가장 높은 NPS 점수(*Net Promoter Score로 한 기업의 고객들이 그 기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이다.)를 받았고 주어진 타깃도 모두 달성했다. 회사에 가시적인 성과와 높은 고객 만족도까지 얻어냈으니, 어카운트 매니저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를 낸 것이다. 지난달 상반기 성과 리뷰를 하면서 매니저에게 시니어로 승진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매니저의 대답은 "Not quite getting there yet (아직 조금 멀었어)"이었다.



시니어가 되기엔 너무 내향적인 사람

내가 너무 조용하다는 이유였다. 사실 처음 듣는 피드백은 아니었다.

물론 2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더 편안해졌다. 예전엔 꿔다논 보릿자루였다면, 지금은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의견을 곧잘 내는 편이고 동료들과는 회사 밖에서 따로 볼 정도로 친하게 잘 지낸다. 다만, 사무실에서는 업무 이외의 잡담이나 수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야기로 운을 떼던 그녀는 외향적인 동료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팀에서 더 존재감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서 다른 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라고 말이다. 그리고 링크드인에 글을 더 자주 쓰라고 했다. 아니, 내 개인 인스타그램에도 할까 말까 하는 포스팅을 링크드인에서 하라고? 이미 브런치에 쓰는 글로도 벅찬데... (물론 그녀는 나의 브런치의 존재에 대해서 모른다.) 그녀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클라이언트들에게 가장 높은 만족도 점수를 받았는데 이 이상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성과에 대한 피드백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성격에 대한 피드백이라니. '겸손하지 말라', '조용히 일만 잘해서는 올라갈 수 없다' 등 해외 직장 생활을 잘하기 위한 조언으로 늘 빠지지 않는 말이고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는 편이지만, 승진을 하기 위해 내향적인 성격을 버리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라는 피드백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매니저라면 목소리만 크고 성과를 못 내는 팀원보다는 묵묵히 맡은 일을 잘하는 팀원을 더 선호할 것 같았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동료들은 말도 안 되는 피드백이라며 무시하라는 반응이었다. 동료들의 위로에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 이후로 허탈함, 속상한 마음은 잠깐 뒤로하고, 내가 영국에서 정말 이루고 싶은 커리어가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이론이 떠올랐다.



만약 회사가 체질이 아니라면?

2014년에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어느덧 10년 차 직장인이다. 영국으로 오면서 완전히 커리어를 바꾸었고 지금은 타이틀이 Manager니, 직급으로 치면 중간급 정도 되는 연차다. 원래 원했던 커리어의 방향은 이 회사에서 Senior Manager로 승진하고 5년 안에 인하우스 디지털 마케팅 팀으로 이직을 하는 것이었다. 직급은 회사/업계마다 다르지만 디지털 마케팅은 보통 Assistant / Executive - Manager - Senior Manager - Head / Director - Senior Director - VP - CMO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내가 과연 저 최고 레벨까지 올라가고 싶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놀랍게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높이 올라갈수록 업무 수행 능력보다는 리더십, 커뮤니케이션 스킬, 특히 그 사람이 가진 네트워크(인맥)가 중요하게 차지해서 특히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업계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면서 네트워킹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일단 내향적인 성격인 나에게는 악몽같은 미션이다. 업계 특성상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네트워킹을 하는 이벤트가 정말 많은데, 그때마다 모든 에너지가 빠져서 그 주 주말은 무조건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겨우 회복이 되는 정도다. 물론 회사가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사람들과 만나서 소통하는 것보다는 글 쓰고 홀로 사색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나에게, 승진 사다리를 한 칸씩 올라가는 것은 나에게 큰 욕심도, 의미도 없었다. 나에게 직장은, 여유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는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금전적 수입처일 뿐이다. 그동안 줄곧 성과를 내면서 주어진 일을 잘 해냈던 이유는 나의 타고난 직업의식과 책임감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글을 쓰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동기부여를 해주기 위함이지 계속 높이 올라가면서 커리어의 최고점을 찍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삶은 회사 밖에 있다

얼마 전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글로벌 테크펌에서 이직 제안이 왔었다. 비자도 스폰해 주고 연봉은 지금보다 무려 +30%까지 인상을 해준다는 말에 홀려 면접까지 봤다. 하이어링 매니저를 만났는데 그녀에게서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시즌을 타는 편이라, 아주 바쁘다가도 갑자기 모두가 휴가를 가는 여름 시즌이 되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식이다. 그런데 그 팀은 1년 내내 바쁘다고 했다. 나는 지금 회사에서 25개의 어카운트를 관리하는데 (이것도 많은 편임)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2-3천 개, 많게는 만 개의 어카운트를 관리한다고 했다. (그걸 '관리'라고 하나요?) 그리고 가장 큰 레드플레그는, 주 5일 사무실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높은 연봉과 네임 벨류 때문에 순간 혹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 5일 사무실 출근은 이제 못 할 것 같았다. 일주일 2번 재택근무를 하며 누리는 그 여유로움, 특히 멀리 여행을 가서도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삶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피드백을 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고민도 없이 연봉을 선택했을 텐데, 그러기엔 회사 밖의 삶이 너무나도 소중해졌다. 일찍 퇴근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 해가 떠 있을 때 러닝을 하는 것, 남자친구와 퇴근 후 함께 요리를 하고 영화를 보는 시간 등 말이다. 나중에 가족이 생기게 되면 그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해질 것이다.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체질입니다

나는 회사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늘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매번 이직을 하며 '더 행복한' 회사를 찾아 나섰다. 한국에서 원하는 삶을 찾지 못해 영국까지 왔다. 그렇게 원하던 영국에 와서 직장이 생겨도 아직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애초에 잘못된 목표를 찾아 나섰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더 행복한 회사'란 존재하지 않고 '더 행복한 삶'도 허상이며, 결국엔 내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라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에겐 그게 회사에서의 성공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사업의 성공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어떤 학문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단순히 부를 늘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겐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고, 그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아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게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때때로 달리는 응원의 댓글이나 "덕분에 용기를 냈다"는 메일을 받을 때면, '아, 내가 이래서 그동안 열심히 살았구나' 하며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열심히 글을 쓰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회사'는 나에게 사람들을 돕기 위한 많은 도구 중에 하나일 뿐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공유할 생각이나 인사이트가 없을 테니까.


이제 갓생을 살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에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면서 괜히 눈물이 났다. 불안이(Anxiety)를 보니 그동안 영국에서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공황 장애를 아주 잘 설명한 부분

영국에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와놓고선 마음속 깊은 곳에선 끊임없이 나를 옥죄었다. 새로운 업계에서 빨리 적응하기 위해, 비자를 받기 위해, 현지인들보다 인정받기 위해, 영어로 완벽하게 말하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늘 실패하지 않기 위한 플랜을 세웠다. 매일 영어 공부를 하고 영어로 된 책을 읽고, 해외 생활하면 유튜브가 필수라고 해서 유튜브 영상을 찍어보기도 하고 이 와중에 퇴근을 하면 디지털 마케팅 강의를 들었다. 클라이언트 QBR이 있는 날에는 밤을 새워서도 발표 연습을 했다. 심지어 제3의 외국어를 배우겠다며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갓생을 살려고 노력하다가 작년에 한 번 크게 번아웃이 왔다.


지금의 나는, 영어 공부를 따로 하지 않는다. 가끔 가다 맘에 드는 표현이 나오면 따로 메모해 두는 정도이다. 책은 한국어 책이든, 영어 원서든 내가 읽고 싶은 것 위주로 읽는다. 유튜브는 내 성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과감히 포기했다. 꼭 영상으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까지 일단 기다릴 생각이다. 지금은 회사에서 벗어나서 '내 일'을 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앞으로 최대 10년까지만 더 한다는 생각으로 수익을 좀 더 다각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공부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좀 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데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기

'갓생'을 살지 살지 않는다고 게으르거나 실패한 인생도 아니고, 커리어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Connecting the dots' (직역하면 '점을 연결하는 것')가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의미가 없거나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Dot, 점)이어도 결국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된다는 뜻으로, 과거의 경험이나 배운 것들을 돌아보면서, 현재의 상황이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들은 지금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의 조언을 듣거나 자기 계발서를 보고 동기부여를 받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명한 글로벌 기업에 입사하지 않더라도, 성공한 사업체를 운영하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반드시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오직 나 자신만이 알아낼 수 있다.


나는 내향적인 나의 모습이 좋다. 시끄럽게 사람들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진심을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에 애정을 담아 귀 기울이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내향적인 성격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매니저의 피드백처럼, 나의 내향적인 성향이 영국 직장 생활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데 혹여나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바꾸려고 스트레스받지는 않으려 한다. 성격을 억지로 바꿔서 성공하는 것보다, 내면의 생각을 글로 풀어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힘이 훨씬 더 가치 있고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향인이 영국 직장생활에서 성공하는 법'이라는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우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할 수 있는 데 까지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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