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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Nov 18. 2024

영국 회사에서 입지 굳히는 법

외국인으로서 주요 팀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

해외 취업의 산을 넘었다면 그다음은 회사 내에서 외국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 굳건히 다질 것인가에 대한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았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성과를 내고, 그러다 보면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이직을 하고 나서는 늘 나의 '존재감'에 대한 고민 해야 했고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왔다. 영국에서는 조용히 일만 해서는 절대 인정받을 수 없다. 특히 외국인이라면 말이다.


내가 속한 세일즈 팀은 클라이언트들과 직접 대면하고 유의미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가장 주요한 역할인데 그러다 보면 사람들과 곧잘 대화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수려하게 말을 잘하는 원어민 동료들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나에겐 준비하는 데만 1시간이 걸리는 프레젠테이션을 그들은 10분 전에 후루룩 훑는 것만으로 충분하니. 아무래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타고난 '인싸' 성향의 동료들이 수월하게 일을 잘했다. 나는 타고난 내향인이라 몇 배로 노력을 해야 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딱히 뒤처진 적이 없었던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꾸준히 마음을 다스리며 타고난 성격이나 언어처럼 단기간에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당장 개선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 왔다. 그 결과, 입사한 지 1년 반 만에 '올해의 세일즈 매니저' 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팀 내에서 가장 높은 거래 성사 금액, 그리고 팀 내에서 최고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가장 많은 클라이언트의 추천서(Testimonial)를 받은, 모두가 인정하는 팀의 핵심 멤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국/유럽 마켓을 담당하는 팀에서 유일한 비영어권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나만의 강점에 집중하기

한국에서만 30년을 살아온 순수 국내파로서, 당장 원어민 동료들처럼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내가 그 누구보다 돋보일 수 있는 강점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니 두 가지로 좁혀졌다: 브랜딩데이터 분석. 우리 회사는 마케팅 테크펌으로, 주요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 디지털 마케팅을 주요 채널로 하는 이커머스 리테일러와 브랜드들이다. 한국에서 7년 동안 브랜드에서 일을 한 덕분에 클라이언트들이 가진 고충이나 브랜드 비즈니스의 우선순위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세일즈를 하다 보면 당장 주어진 성과를 달성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클라이언트들의 입장에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그 노력들이 자연스레 세일즈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담당하는 클라이언트들의 70%는 패션 브랜드들이다. 특히 패션 업계에서 MD로 오래 일한 경험 덕에 전문성이 있는 분야 - 상품 원가, 유통, 마진구조 등 - 들을 바탕으로 클라이언트들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제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면 패션계의 새로운 소식이나 브랜드, 트렌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그들의 생각과 인사이트를 들었다. 그 덕분에 한 클라이언트의 표현을 빌리면 '뭘 좀 아는' 어카운트 매니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브랜드에 대한 전문성을 나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살린 것이다.


그리고 MD로 일하면서 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일을 해왔고 내가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자 자신 있는 분야였다. 처음 입사했을 때 회사에서는 새로운 데이터 툴을 도입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이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고, 그 이후 그 데이터 툴을 완벽하게 숙지하는 데 집중했다.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기존 데이터 툴에 의존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데이터 툴을 활용해서 자유자재로 데이터 대시보드를 만들고, 많은 단순 업무들을 대시보드로 자동화시켜서 업무 효율성을 크게 향상했다. 데이터가 더 정교해지면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더 높아졌고, 자연스레 클라이언트들의 만족도도 따라왔다. 지금은 팀 내에서 'Queen of Data'라고 불리며 사내에서 관련 교육도 담당하며 데이터 전문가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해외 직장 생활에서 팀 내 존재감을 키우는 것이 고민이라면, 단점에 집착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강점을 적극적으로 키워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꼭 외향적인 성격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내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자동으로 따라오는 수식어가 생긴다면, 이미 성공한 것이다.


다른 동료들 적극 도와주기

한국에서는 개인에게 주어진 목표보다는 궁극적으로 브랜드 매출과 팀 성과를 기준으로 평가받는 문화에 익숙했지만, 지금 팀에서는 개인별로 쿼터별 목표가 따로 주어진다. 그러다 보니 바쁠 때는 자연스럽게 개인 목표에만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어쩔 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결국 팀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담당하는 어카운트가 아니더라도 우연히 리드(lead)가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관련된 동료에게 넘겨주었다. 아마 내 매출 목표만 생각했더라면 어차피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동료에게 넘겨준 덕에 그 리드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냈고 결국엔 내 어카운트에도 추가적으로 버짓이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데이터 툴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에겐 시간을 내서 속성 강의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도움을 준 동료들은 내가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우리 팀은 평소에 서로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샷 아웃'(Shout-out)하는 문화가 있는데, 나는 매주 다양한 동료들의 '샷 아웃'을 받는다. 물론 혼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를 아낌없이 돕고 그 도움을 다시 돌려받는 선순환 속에서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다. 단순한 팀워크를 넘어 함께 성장하며 만들어가는 관계. 이 방법이야 말로 팀 내에서 긍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라고 생각한다.



똑똑하게 성과 내기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개인의 성과는 평가에서 제일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아무리 나의 강점을 살리고, 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도운다 해도 결국에는 내가 회사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주어야만 인정을 받는다. 성과를 내는 방법은 개인이나 직무에 따라 다르지만, 단순히 무작정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전략적으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회사의 어카운트 매니저들은 성과 평가에서 70%는 매출 달성 목표, 30%는 세일즈나 소프트 스킬과 관련된 요소로 비중이 나뉜다. 매출 달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클라이언트 상황이나 시장 상황에 따라 내가 100%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 탑 5에 들던 매치스 패션이 갑작스럽게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함께 일하던 담당자들이 모두 정리해고 된 적이 있었다. 브랜드 자체가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내 매출 목표의 30%에 공백이 생겼었다. 이런 상황들은 나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변수이고, 이를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태도 역시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된다. 나는 매니저와의 주간 1:1 미팅에서 진행 상황과 성과를 강조하고, 매출 달성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항상 플랜 B를 제안하는 편이다. 그 플랜이 실현되든 아니든, 매니저와 임원들에게 현재 시장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는 내가 최선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과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책임감 역시 높이 평가한다. 이제는 무조건 열심히만 일하는 시대는 지났다. 성과를 내는 것과 동시에 내가 회사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하게 증명해야 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네트워킹

해외 직장 생활에서 빠지지 않는 조언 중 하나가 바로 "네트워킹을 하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특히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해외 취업을 하기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똑같다.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회사 생활을 하며 쌓은 인맥이 곧 나의 힘이 되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 영향력은 더 커진다. 네트워킹을 통해 좋은 평판과 레퍼런스를 쌓지 못한 사람은 내부적으로 승진이 어렵고 퇴사 후 이직 기회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나처럼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네트워킹은 가장 어려운 미션 중 하나다. 그동안 수많은 컨퍼런스와 업계 파티에 참석하면서 억지로 스몰톡의 향연에 나를 밀어 넣곤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의미 없는 대화들을 나누면서 "이게 정말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점은, 억지로 사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네트워킹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적인 네트워킹은 단순히 스몰톡을 나누거나 술자리에서 친밀감을 쌓는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뢰의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 번은 나와 비슷한 내향적인 성향의 클라이언트를 업계 이벤트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광고주의 입장에서도 이런 자리가 어색하고 힘들다고 털어놓던 그녀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나와의 진솔한 대화가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클라이언트들과 나는 비록 시시콜콜한 일상이나 농담을 주고받거나 친구처럼 지내진 않지만, 나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믿을 수 있는 파트너라는 사실을. 결국 네트워킹의 본질은 단순한 사교 활동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주고받는 신뢰와 협력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내향적인 사람이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네트워킹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나에게는 그 방식이 '신뢰'였다.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신뢰 덕분에 지금은 나만의 네트워크 자산이 생겼다.





해외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장점과 가치를 믿고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며 묵묵히 쌓아온 성과들은 결국 나를 빛나게 해 줄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억지로 변하거나 남에게 맞추려 하기보다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의미 있는 해외 생활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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