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 비행기에서 발견한 산소마스크 안내 문구다. 무언가 빠져있었다. 5번 정도 작게 소리 내어 곱씹었다. 순간 옆에 탄 사람이 자리를 옮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색한 문장 속 무언가 생략됐다고 느꼈던 이유는 굳이 쓸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단어가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착용 후 도와주세요.’ 뒤에 붙어있는 도와주세요 라는 단어가 맥락을 잡아준 덕에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공책에 써둔 문장이 물에 묻어 번진듯한 이질감이 들었을 뿐이다. 나에겐 ‘쓸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단어가 아니었다. 나보다 남이 먼저인 게 당연한 이치였다. 자칫하면 남들 산소마스크만 부리나케 씌워주다 죽을 뻔했다.
누군가에게는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사람이다. 뭘 선택하든 상대방이 정말로 상관없어하는 게 보이면 답답한 마음에 내 의견을 곧바로 드러내는 편이다. 반대로 특정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 상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과 거리낌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되면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별개로 나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이렇기도 저렇기도 한 사람인데, 그 이유가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좋을지 고민하여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 둘 중에 조금 더 ‘나’와 가까운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고민 없이 후자에 해당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남을 끌어오는 것보다 남이 하고 싶은 걸 내가 같이 해줄 때가 더 행복하다. 상대도 그렇고. 여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게 그렇게까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이더라도 내가 싫어하는 건 안된다는 전제가 깔린다.
그렇게 대부분을 좋게 말하면 배려, 나쁘게 말하면 줏대 없이 살아왔다. 종종 나를 불쌍하게 보는 사람이 있긴 하다. 항상 아무거나 상관없고 답답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며. 너는 네 행복을 위해 남에게 양보한다고 하지만 그거 다 핑계 아니냐며, 좋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 않냐며 나무랄 때도 없잖아 있다.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는 게 웃음이 났지만, 최소한 나는 스스로에게만큼은 마음이 가장 편한, 나를
위한 방향으로 살고 있다. 심지어는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