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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seul Feb 25. 2024

하얀 거짓말

합의된 약속시간 보다 10분 여유를 두고 신발을 신는다. 구태여 먼저 도착하고 나서야 자꾸만 발에 밟히던 신발끈을 두 어번 꽉 묶어 맨다. 사람들의 눈에 밟히지 않을 만한 곳으로 몸을 숨긴 채 기다린다. 처량해 보이지 않도록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제스처를 적막한 청중을 향해 괜스레 허우적대본다. 두리번 거린다. 시간을 확인한다. 기다린다. 저 앞 코너에서 당신의 발끝이 보이기 전까지 이 주기를 반복한다.


기다리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뭐 그런 가학적인 취미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차오른 행동이 몸에 베인 것 뿐이다. 내가 늦으면 당신은 정말 괜찮다며 손사래 치지만 나는 없는 미안함을 기어이 산다. 서둘러 가는 동안 초조해하고 자책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당신의 기다림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초조함을 반추하다 보니 얼핏 두려워졌다. 그런 마음은 없는 구실을 만들어 주변의 것들을 미워하도록 부추겼다. 유약한 마음이 금세 드러난다. 코앞에서 지나간 지하철에 연연하게 되고 버스의 발목을 잡는 수많은 차의 운전자들을 원망하게 된다. 빨간불의 남은 시간은 왜 보여주지 않냐며 싫증 낸다. (알아도 바뀌는 게 없는데 말이다.) 버스에 내려, 지하철 계단을 올라와 목적지까지의 긴 도보 시간을 확인하고 나면 종국에는, 먼저 도착한 당신을 미워하게 한다. 조금만 더 늦게 도착하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다 보니 문득 약속 시간 10분 전에 당신에게 닿은 연락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나를 미워하게 만들까 봐 겁이 났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지어낸 습관이니 질타받아 마땅한 건가, 이기적이게 그건 또 싫었다. 그럼 내가 늦어도, 늦지 않아도 당신에게 밉보이게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운명처럼 가는 길에 마주친 척하는 건 어떨까. 만들어낸 우연에 기대 웃음을 자아내는 게 기괴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이건 너무 음침한가.


거짓말. 그래 거짓말을 하자. 나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천천히 오라고.


- 어 와 있었네?

- 나도 방금 막 도착했어, 지하철 놓쳤거든

- 진짜? 다행이다. 늦게 와서 너 기다릴까 봐 걱정했어.

- 우리도 참 웃기다. 늦을 땐 항상 같이 늦는다니까.

- 그러게 어쩜 매번 그러네 


그렇게 내가 만들어낸 10분이라는 시차는 당신을 만나 원래대로 돌아온다. 언젠가 들킬 이 거짓말을 바라보게 될 당신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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