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님 책의 첫 꼭지가 마지막 꼭지가 되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다가 끝내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사실 나는 누군가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일기마저도 그렇다.라는 팔딱거리는 날 것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런 게 솔직함이라는 거구나. 속이 니글거린다거나 손발이 오그라들지도 않았으며 꾸덕하지도 않았다. 소금과 후추를 팍팍 쳐야 맛이 날 것 같이 생겼는데 막상 먹어보니 삼삼한 그대로의 맛이 좋았다. 담백한 솔직함. 한 글자도 괜히 쓰인 것이 없었다.
나는 그 글을 떠받들듯이 대했다. 비단 공감과 위로뿐 아니라 경탄, 예찬 등의 감정들이 머리를 세게 때린 탓에 멍하니 입만 뻐끔거렸다.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어쩜 이렇게 나무토막 자르듯 반듯하고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걸까. 평소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도 이만치 고독하면서도 우아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구나. 단지 내가 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숱하게 흩날리는 먼지를 눈 감고 손으로 휘저어 내칠 때, 누군가에게는 그것들이 민들레 홀씨가 되어 어디에 안착하는지 끝까지 지켜보며 이야기로 피워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나는 그러지 못했음에 질투가 났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나에게 있어 질투라는 감정은 내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야 느껴지는 감정의 종류니까. 누군가의 글을 읽고서 절망을 느낀다면 저자도 나도 모두 괴로웠을 테니까, 참 다행이었다.(사실 저자는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으니 나 혼자 괴로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질투라는 감정에서 그칠 수 있는 나의 한계점은 한 꼭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미워하거나 집착하고 싶지 않은 심정에, 그저 좋았다는 단순한 감정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그칠 수 있도록 짝사랑 대하듯 책을 덮었다.
이에 더해서 불쑥 찾아온 '두려움'도 더 이상 글자를 읽어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는 데 한 몫했다. 글감이 뺏긴다는 두려움이었다. 하필 첫 꼭지의 내용이 내 마음 모양의 틀에 짜내서 꼭 맞추어 놓은 듯 똑같았다. 그러니 내가 쓸 수 있었던 글감 중 하나를 뺐긴 것이었다. 같은 주제라 하여도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거기에 적힌 글은 내 마음과 쏙 빼닮은 탓에 나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의 글들도 이렇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미워하지 않기 위해 더 들여다보는 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