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책으로 낼 만한 원고인가요?
편집자라는 직업이 나에게 온 이유 -1
편집자가 되고 나서 가장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은 단연 '원고 검토'다. 원고 검토가 뭐냐면, "이 원고 어때?" "이 원고 책으로 낼 만해 보여?"라는 말에 답하는 일이다. 이 질문들이 곤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나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책이 잘 팔릴 것 같은지, 점쟁이와 같은 안목으로 봐주길 바라는 말에 가깝다. 당장 내일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물인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나는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원고를 검토하게 될 일은 무수히 많다. 회사 메일로 온 투고 메일에 답해야 하고, 기존 저자의 차기작도 검토해야 하며, 상사를 통해 들어온 검토 요청을 대신 하게 될 때도 있다. 가만히 있는데도 쏟아져내리는 검토할 원고들...! 시간은 늘 부족한데 이 원고들을 책으로 낼 만한지, 책으로 내려면 어떤 점을 살리고 어떤 점은 보완해야 할지를 밑도 끝도 없이 생각해내야 한다. 처음엔 막막해서 '나라면 이 책 안 살 것 같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보고, 나와 다른 독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면인 원고와 씨름을 시작한다. 주제의 시의성이나 저자의 글솜씨, 영향력 등을 파악해서 근거를 빌드업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한없이 오래 걸리게 되는데, 대개는 '이렇게 말하면 저자한테 상처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쿠션어를 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이 피땀눈물을 쏟아가며 쓴 원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을 주절거려야 하는 입장에 놓이는 게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지금 쓰는 이 짧은 글도 끙끙대며 쓰고 있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원고지 700페이지, 800페이지를 거뜬히 써낸 그들에게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그래서 더욱더 꼼꼼히 본다. 납득하실지 안 하실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원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기 위해. 그러려면 집중해서 봐야 한다. 허투루 보고 딴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원고의 뒷면에 숨은 의미까지 꿰뚫는 안목까지 없더라도 써둔 글은 제대로 읽고 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나에게 자기 글을 보여준 사람에 대한 예의다. 34년간 두려워서 남 앞에서 글을 쓰지 않은 나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한편으로는 이 직업을 갖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내 의견을 물어봐주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게 주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는 이런 책은 안 볼 거 같은데요"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이런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좁은 세계에 갇혀 "이런 책을 누가 좋아해" 하는 사람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최근엔 '이런 두꺼운 벽돌책을 누가 읽어!' 했는데 그 책들이 잘만 팔리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된다.누가 자꾸 내 생각을 물어봐주니까 '나는 어떻게 생각하지? 왜 그렇지?' 고민을 반복하며 나에 대한 데이터를 쌓게 되는 것이다. '나 이런 책 좋아했네.' '나 이런 건 또 싫어하네.' 깨닫는 순간마다 조금씩 더 뾰족해지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생각 없이 흐리멍텅한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직업이 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 편집자라는 직업이 나에게 준 것은 참 많지만 이것 역시 내가 취해야 할 장점일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면서 점점 날렵한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저라면 이런 책 안 읽을 것 같은데요" 같은 미숙한 답변은 졸업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