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프로젝트 산책자는 산책을 하며 발견하는 것들에 대한 한 사진작가의 시선이다. 이 사진작가는 사람들이 급하게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걸음이 빠른 것도 빠른 것이지만 느리게 걸어도 주변을 둘러보기보다는 이어폰 속 음악과 누군가 보낸 짧은 메세지와 혹은 어떤 고민들을 한가득 채우고는 걸어 다닌다. 작가는 그런 점이 참 안타까웠다. 그의 눈엔 지나다니는 모든 길들에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래서 산책을 사랑한다. 혹자들은 말한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볼 때가 더 아름답다고,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느냐며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관용구를 예시로 든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더 가까이에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 그곳에서 보면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주 멀리까지 티를 내지는 않지만 당신이 눈여겨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시선으로 더 작은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그저 작가의 버전일 뿐이고, 작가가 살아온 삶에서 모아 온 영감주머니를 연료로 삼아 세상을 바라본다. 아마 당신이 본다면 당신의 연료로 보는 세상은 또 다를 것이고, 상상만 해도 너무 재밌을 것 같다.
이 정도의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계기도 살짝 남기고자 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읽고 있는 요즘이다. 산책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산책하는 사람이 쓴 글이다. 그 사람은 발저 본인이며 산책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 작가이며 생을 마감할 때조차 산책을 하다가 죽었다. 또 정말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작가인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타서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한창이다.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모두 컨텐츠거리가 되었는데, 그중 그녀가 산책을 너무나도 사랑하며 루틴처럼 여긴다는 이야기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의 것만으로 이렇게 연재를 즉흥적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산책을 좋아했으며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계기도, 책에서 어떤 한 이야기를 보면서 공감했기 때문인데 그 책은 '천문학' 혹은 '천문학자'라는 이름의 책이었다. 책의 아주 초반부에, 어떤 과학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사색할 거리도 너무 많은데, 호기심도 너무 많으며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아서, 이쪽 길에서 저쪽 길까지 가는 한 걸음걸음마다 이번 걸음에서는 떨어진 나뭇잎이 보이고, 다음 걸음에서는 가로등의 높이와 소재가 보이며 그다음 걸음에서는 버려진 작은 쓰레기가 바람에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저게 뭔데..? 원래 우리 주변에 있는 거잖아? 라며 생각할 수 있지만 과학자에게는 나뭇잎의 산화 정도라던가, 가로등의 전기가 출발하는 곳이라던지, 바람에 떠오르는 부력과 함께 쓰레기의 무게를 예측해 본다던지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흥미롭고 놀이인 것이다.
그에게는 정말 세상이 놀이터인 것이다. '놀이터'라고 하니까 익숙한 표현이 떠오른다. 바로 '인생은 고수에게는 놀이터, 하수에게는 생지옥이지'라는 바둑 영화 신의 한 수의 대사다. 놀랍게도 우리는 놀이터가 되는 법을 알아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이 흐름으로 나는 충격을 받았고, 산책을 할 때면 어렴풋 느꼈던 충만해지는 감정들이 이런 과정을 타고 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프로젝트 산책자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떠올랐다.
산책이란, 세상을 놀이터로 만드는 일이다.
프로젝트 산책자를 통해, 한 사진작가가 세상을 놀이터로 만드는 방법을 전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