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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 May 15. 2019

늘 이런 식이었다

#03, 2019, KM

감히 삶이 어떻고, 인생이 어떻고 하는 문장을 읽는 걸 참 곤욕스럽게 생각하는 편이다. 자기 개발서를 읽는 것이 힘든 것도 그러한 연유고, 심지어는 성경도 그래서 멈춰 설 때가 있다. 그런 말을 직접 내뱉거나 그런 문장을 쓰는 것은 그렇다면 얼마나 낭패인가. 그렇지만 그런 말이든 그런 문장이든, 감히 삶과 인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삶과 인생을 거론해 그것을 탓하지 않고는 도저히 어떠한 돌파구를 찾기 곤란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사실 지금이 그렇다.





삶은 보통 흐른다. 그것은 어디로든 흘러간다. 그것이 스스로 멈춰 서지는 않지만, 같은 곳을 반복해 마치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물의 비유와도 같다. 그런 반복이 계속되고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면 결국 그 삶은 그곳에 멈춰 선다. 어떠한 문제를 만날 때 그렇다.





발리에서 아쉬탕가 요가 수업을 들었었다. 아쉬탕가는 호흡이 중요한 요가다. 선생은 첫날 호흡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했다. 호흡은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유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호흡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대학에 4천만 원을 바쳤다. 그런데 요가는 호흡을 쓰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 유지를 통해 올바르게 호흡을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흘려보내는 것'인데, 그것은 호흡 위에 나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분노와 시기와 질투를 싣는 것이었다. 요가는 단순한 고도의 동작을 통한 다이어트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어떤 고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어떠한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깨달음 말이다. 이런 호흡의 비유라면, 문제를 흘려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호흡을 원활히 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 신자로서,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낯선 접근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유일신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때문에 어떤 행복도 어떤 고난도 모두 그 섭리 안에서 하나의 작동으로 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가는, 그것을 스스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어떤 문제를 마주했다. 이 문제는 어떤 면에서 무지 크다. 누군가에게는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거리를 두면 나도 안쓰러울 정도로 웃긴 일이다. 그치만 이것은 나에게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반복적인 실패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문제를 사소히 대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정체기에 들어섰다. 이것은 비단 이번 사건만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매너리즘에 빠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얼마간의 시간을 까맣게 칠했다. 변화를 위해 미루고 거부했던 것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단계에서 나는 또 운명의 장난 같은 실패를 만난다. 이 실패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나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삶은 이런 식이다. 돌이키면 늘상 이런 식이'었'다. 내 삶은 이렇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정체기를 맞는다. 물고를 트지 못하면 마침내는 썩은 똥물이 될 것이다. 적어도 대류라도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을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다. 어디선가 구린내가 나는 착각이 든다. 착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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