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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 Jun 04. 2019

세부에서

여행을 가면 다이어리를 꼭꼭 챙기는 편이다. 여행 중 생각나는 것들을 죄다 적고 기록하는 편집증적인 취미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많이 걷고 천천히 자세히 보는 여행을 선호한다. 그래야 쓸거리가 많으니까. 사실은 그런 것들을 마구 적어서 정리하고 잊힐 즈음 때때로 읽어보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내 여행은 대체로 아주 정적이다.






그런데 이번 필리핀 세부 여행은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챙기지 않았다. 고향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이벤트들을 3박 5일 내에 다 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여행에서는 세세한 계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편인데) 여행 타임테이블을 받아 보니 일기를 쓰는 행위는 말 그대로 사치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케줄을 엄청나게 빡빡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인체공학을 깡그리 배제한 채 설계한 소형 버스를 타고 100킬로가 넘는 속도로 4시간을 달려 고래와 사진을 찍었다. 오토바이에 두 명씩 매달려 20분간 사타구니와 허리의 통증을 참으며 도착한 곳에서 4시간 동안 계곡을 가로지르고 15미터 절벽에서 다이빙을 했다. 다시 4시간 동안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한 소형버스에 감금된 채 숙소에 도착했고, 곧장 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저녁을 먹으러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이런 건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들을 비몽사몽 간에 그저 그런 가격을 치러가며 먹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빤스 바람을 한 채 마사지 베드 위에 누워있었다.








둘째, 셋째 날은 더욱더 가혹했다. 우리는 소녀시대 뺨치는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그랩을 타고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동했다. 우리가 이동한 곳에는 에어컨이 아주 잘 설치되어 있는 곳들이었다. 그랩 택시는 물론이었다. 동남아에 와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디오드란트가 무용할 만큼 뽀송뽀송한 그랩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낙후된 도시와 의욕 없이 거리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풍경뿐이었다.








어떤 생각도 나에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엉덩이만 붙이면 잠을 자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면 프리 다이빙을 하고 있고, 정신을 차리면 스노클링을 하고 있고, 정신을 차리면 선상 위에서 신라면과 맥주를 먹고 마시고는 했다.








엄청난 스케줄을 끝마치고 이륙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비행기에서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김해에 도착할 때쯤 나는 김해-김포 환승 티켓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티켓팅 한 친구에게 도착시간을 여러 차례 물었지만 그는 늘 내게 확인하지 않은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샘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고작 한 시간 차이나는 시차를 계산하지 못하고 실수한 나에게 너무 화가 났다. 워낙에도 예민하지만, 피곤의 누적이 나를 정말 화나게 했다. 화가 나면 으레 그렇게 해왔듯 나는 입을 닫았다. 그 침묵은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예민했을 친구들의 입까지 막아버렸다. 우리는 공항에서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나의 상황을 알리고 다시 비행기표를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내 눈치를 살피느라 난감해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있었다.






나는 단순히 도착 시간을 체크하지 않은 것만을 스스로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 내내 받았던 스트레스를 모조리 스스로에게 책임 지워 힐난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내 여행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어떤 내색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의 계획에 나를 맞추는 일에서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피로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스케줄에 즐겁게 임했다. 아니지, 충분히 즐거워 보이게 임했다. 즐겁다는 듯 사진을 찍었고, 즐겁다는 듯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스트레스였고, 그것을 표출하지 않은 스스로를 향한 자책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은 비단 일기장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롯이 내 문제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본인의 여행 스타일이 있는 거다. 친구들은 그걸 적극적으로 어필했고, 나는 숨기고 감췄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돌아왔다. 배려랍시고 양반처럼 행세한 내 잘못인 거다. 때마다 나의 좋고 싫음을 말했다면 나는 입을 닫아버리지 않았을까. 그건 또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결국 이런 후회만 남았다는 거뿐이다.







쉴 틈 없는 이벤트를 치르고, 세 시간 동안 세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네 시간 비행기를 타고 김해에 도착해, 두 시간을 기다리고, 한 시간을 비행해 김포에 도착해, 애인을 만나 짐을 맡겼다.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면도기를 사서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양치를 하고 출근을 했다. 턱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흐르는 피를 휴지로 대충 닦아냈다. 휴지 군데군데가 붉어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똑같은 하루를 맞았다. 마찬가지로 즐겁지 않지만 추억도 되지 않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스트레스로 가득하던 날이 비몽사몽간에 내 머릿속에 간헐적으로 복기된다는 것. 전혀 내 여행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잊지 못할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조금 씁쓸하게 되짚어 보는 것. 마지막 순간에도 괜찮은 척할 수 있었으면 더 좋은 추억이 됐을까. 즐거운 척 연기하던 것마저 조금은 그리운, 전혀 즐겁지 않은 일상으로 완전하게 돌아온 것이다. 나의 여행의 끝은 이런 식이다. 이상야릇한 후회와 멜랑콜리와 역겨운 삶의 항상성과 일탈에 대한 강한 욕구가 뒤섞인다.








나는 어쨌든 돌아와야 하는 일상의 자리라는 것이 있다. 억지로라도 즐거운 척할 수 없는, 그렇다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피할 수도 없는 곳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래야만 또 떠날 수 있겠지, 하고 자위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리로 돌아와야만 한다. 최면을 걸듯 되뇌어 보자. 돌아와야 떠날 수 있다. 떠나는 것은 본래의 자리라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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