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회로 돌리기
지갑을 가지고 다니던 몇 년 전, 내 지갑에는 현금도 카드도 아닌 종이 1장이 들어있었다. 지폐와 같이 길쭉하게 생긴 이 종이는 일주일에 한번 발표되는 숫자에 따라 인생을 바꿔줄 기회가 되는 대단한 종이였다.
네 글자 이름도 복스럽다. 연금복권.
몇 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작은 크기가 아니어서 나는 지폐 넣는 칸에다 연금복권을 같이 넣어뒀다. 그리고 희망회로를 돌렸다. 1등이 되면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돈으로 얼마나 알차게 먹고, 사고, 저축할지에 대해. 한 번에 많은 돈을 주는 로또보다 꾸준히 주는 연금복권은 매달 크리스마스 선물 받는 기분을 느끼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 복권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할 만큼 당첨운이 없다는 사실!
불로소득은 내 팔자에 없는지 여러 장을 사고서야 꼴찌 1장 당첨(1천원)이, 그것도 개미 눈물만큼 된 적을 빼면 당첨된 적이 없다. 그래도 매주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1장을 사놓고 두고두고 희망회로를 돌리고, 그래도 퇴사욕구가 치밀어 오르면 결과를 확인하곤 했다. 그런 복권을 사지 않게 된 건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부터였다. 내게도 복권보다 적금 넣는 게 재미있던 날이 있었다.
올해 들어 유난히 집에 안 좋은 일이, 그것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써야만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다시 복권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머리는 알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당첨된 금액보다 내가 산 복권의 액수가 더 많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걸.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라도 희망 가득한 상상을 필요로 했다. 현실이 달콤하지 않아서. 마카롱처럼 달달한 희망을 되찾기 위해 엄마와 밤 산책을 가던 어느 날 긁는 복권인 스피또를 샀다.
스피또는 행운 번호와 일치하는 번호에 적힌 당첨금만큼 돈을 준다. 복권 뒷장에 적힌 확률 상 3.3장중 1장은 1천원 당첨이다. 역시나, 1장이 1천원에 당첨됐다. 그리고 나는 꽝. 엄마가 복권을 긁었는데 어라, 이게 무슨 일이야! 5천원에 당첨됐다. 이천만원, 오억원 같은 멋진 녀석들 사이에 소소하게 빛나는 5천원에도 엄청난 감격이 밀려와서 ‘와 현금으로 바꿔서 고이 보관해야하나 이거!!!!’를 외치며 신난 마음으로 5천원을 바꿔 스피또와 로또를 구입했다.
결과는 스피또 3장 다 꽝! 보자보자, 아직 로또가 남았으니까 어떤 상상을 해볼까. 5천원이면 아이스크림 2+1 먹을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꾹 참고, 몇 달 뒤에 로또 결과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빠가 일하다 크게 다치셨다.
올해는 행운이 파업선언이라도 했나보다. 불행이 시도 때도 없이 뒤통수를 친다. 어쩐지 7월 달 반짝 행복하더라니.
나는 2줄짜리 로또를 보며 뭐라도 되기를 바랐다. 미미한 행운이라도 힘입어 이 순간을 버틸 수 있도록. 불행 중 다행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로또 5천원에 당첨됐다. 6자리 숫자 중 3자리 숫자가 일치했다. 그래, 꼴등도 이런 거라면 반갑다. 이 미미한 행운에 나는 또 희망회로를 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