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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Nov 11. 2022

어떤 죽음

어떤 죽음이건 그 무게는 동일하기에...

출근 없는 주말. 느긋하게 자고 일어나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헤드라인에 적힌 한 줄 문장에 나는 ‘저런....어느 나라에서 저런 일이.’하고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설마 우리나라 그것도 이태원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사일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올라오는 인터넷 기사에 그제야 ‘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구나.’했다.      


너무 놀라거나 어이가 없을 때 말문이 막힌다고들 한다. 내가 딱, 그랬다. 말문이 막히는 죽음. 며칠 내내 기사와 각종 루머들이 난무했고, 정치판에서는 이를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바빴다. 사상자 수가 늘어갈 때마다 그저 눈을 감고 모르고 싶었다. 

     


맑고 높은 가을하늘 아래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짙었다. 이태원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같은 시기 봉화 갱도에는 2명이 고립되어 있었다(현재 무사히 구조되어 생존하셨다). 이태원 참사 전에는 spc노동자가 사망했고, 최근에는 경기도 오봉역에서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사망했다.      


어떤 죽음은 짧은 기사 하나로, 어떤 죽음은 실시간 영상과 무수한 기사로 도배됐다. 죽음 앞에서도 숫자에 따라 순위가 나뉘는지 그 시기에 묻혀버린 죽음도 많았다. 단풍과 은행잎 대신 기억해야 할 죽음이 너무도 많은 가을. 내게는 어떤 죽음이건 그 무게가 동일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마음으로 슬퍼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기사와 영상은 보지 않기로 선택했다. 지금 내가 생각해야 하는 건 각종 소문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원하지 않은 때에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라져 간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가끔 생각한다. 시민을 보호하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이를 수행하는 기관 및 실무자들이 겨누고 있는 칼끝은 정말 가해자가 맞을까. 왜 매번 사그라든 이들에게 붙는 이름은 시민, 작업자, 노동자 등일까. 사탕발림 같은 말과 가벼운 사과로 넘어간 기업은 그 말을 지키려고 손톱만큼의 애는 쓰고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하는 기관은 정말 조사를 제대로 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그리고 재가 되어 사그라진 무수한 죽음이 슬프지만 잊지 않고 마음 한쪽에 담담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둘 것이다. 


내가 아니었을 뿐, 언제고 내가 될 수 있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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