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성수점은 일반 가구 매장과 달랐다. 그곳은 가구 점포라기보다 전시장에 가까웠다. 이 전시장은 '지속가능성'이란 이케아의 모토를 온몸으로 표 현하고 있었다.
1층 출입구로 들어가니 연녹색 유리조각과 합판 쪼가리로 만든 구조물이 있었다. 흔한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왕릉 같이 보였다. 버려진 가구와 깨진 유리로 만든 무덤은 모든 물건들의 종착지였다. 하지만 봉분 꼭대기에 있던 의자는 그곳이 생명의 모태이자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출발지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버려진 물건이 새로운 가구로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케아 예술작품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분분한 추상 미술보다는 19세기 사실주의 예술에 가까웠다. 큐레이터나 도슨트 없이도 누구나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전시장이라니. 매우 이케아스럽다고 느꼈다.
작품 전시장 바로 옆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그곳은 사색과 의미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소유욕이 발동하는 장소였다. 나는 무덤에서 살아 나온 보석함 하나에 꽂혔다. 천연 소재인 대나무로 만들어진 보석함은 귀금속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투박해 보였지만, 만듦새가 짱짱한 것이 본연의 기능에는 충실했다. 싸구려 귀금속도 그 안에선 자존감을 회복하고 마음껏 빛을 바랄 것 같았다.
만원이 조금 넘는 착한 가격도 마음에 들었다. 저렴한 친환경 제품이라니. 손이 저절로 갔다. 하지만 보석함을 사지는 않았다. 집에 멀쩡한 보석함이 있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친환경'이란 단어가 붙으면 가격이 올라가야 한다. 제품 생산 원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깨어있는 시민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웃돈을 주고라도 친환경 제품을 기꺼이 구매한다. 이것은 환경 보호를 위한 자기희생이다. 사랑이 빠진 사람이 그러하듯, 희생의 대가가 클수록 만족감도 커진다.
그런데 친환경 제품이 저렴하다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 그야말로 합리적인 소비이다.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쌌을 뿐인데 환경을 보호했다는 자부심이 무료로 주어진다.
조금 쓰다가 질리면 버려도 무방하다. 대나무로 만든 책상이나 의자, 보석함 따위는 다른 나무 소재로 만든 제품보다 재활용이 쉽다고 한다. 오늘 내가 산 대나무 의자는 어제 누군가가 쓰다 버린 보석함일 수도 있다. 죽음과 부활의 순환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대나무의 여행이 중단되지 않는 한, 낭비되는 자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의 편의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환경보호는 먹을 것 다 먹고 운동도 안 해도 살을 뺄 수 있다는 다이어트 보조제, 리스크가 제로인 고수익 투자 상품만큼이나 의구심을 일으켰다.
물론 이케아를 욕할 수는 없다. 이케아는 '디자인의 민주화'를 이룩한 대단한 기업이다. 창업자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는 부자들의 전유물이던 인테리어를 대중화시켰다. 학생 시절, 7평짜리 원룸에서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내가 그나마 구색을 갖추고 살았던 것은 다 캄프라드 덕분이다. 지금 이케아가 벌인 일도 일부 깨시민의 전유물이던 친환경 제품을 대중화 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대가 없는 환경보호'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 것은 왜일까. 나는 환경 보호에 있어서도 고통받지 않으면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새디스트인가. 소유욕이 지배하는 장소에서 의도치 않은 사색에 빠져 정작 물건은 하나도 못 사고 빈손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