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 이상
소설가 이만교 선생님이 선정한 필독서라 읽었다. 이상이란 작가도 날개란 책도 알고 있었지만 읽은 건 처음이다. 기대가 컸다. 워낙 유명한 책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뭐지 싶다. 기둥서방 하나가 기생집 한켠에 머물며 빈둥거리는 내용이 다다. 마지막 부분은 아예 이해가 안된다. 주인공은 “불현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한다. 겨드랑이는 인공의 날개가 있던 곳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떨어져나갔지만, 그 순간 다시 솟아나려 한다. 아니 솟아나길 바란다. 주인공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한다. 갑자기 웬 날개 타령인가 싶지만, 이 소설 제목이 날개인 이상 그냥 쓰인 내용은 아닐 것이다. 뭔가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하고, 나는 그걸 간파해야 한다. 하지만 내 독해력으론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소설 습작생이 자기의 소소한 일상을 썼는데 마무리가 잘 안되니 대강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얼버무린 것 같다. 물론 그 유명한 이상 선생님이 그러진 않았겠지만, 내가 이상도 날개란 제목도 모르고 그냥 무명씨가 쓴 글로 봤다면 분명히 그리 읽었을 것이다.
앞 장을 좀 되짚어 읽어봤다. 주인공인 나는 그냥 사는 인물이다.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 어려웠다.” 이게 주인공의 심정이다. 발에 채이는 돌이나 둥둥 떠다니는 구름처럼 존재하나 존재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은 그런 존재.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그 희귀성을 생각한다면 주인공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주인공과 아내의 관계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 아내는 몸을 파는 일을 한다. 남편인 주인공은 같은 방은 아니지만 어째든 그 곁에 같이 산다.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주인공이 아내가 뭐 하고 사는지 모른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매일같이 남자들이 드나들고 집에는 화려한 옷가지와 온갖 냄새의 향수가 있다. 어린애가 봐도 여자가 화류계 여성이란 걸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주인공은 모른다. 알지만 외면하는 걸 수도 있지만 주인공은 정말 모르는 듯 하다. 진심으로 아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한다. 그렇다고 그가 백치는 아니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스피린 대신 아달린을 줬을 때 드디어 의심이란걸 한다. 아달린은 수면제인 듯 하다. 자신을 재워놓고 무슨짓을 한건가? 내 건강을 걱정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의심을 품는다. 이런 친구가 실제로 내 곁에 있다면 그걸 이제야 알았냐 이 멍청아!란 말을 해주고 싶다.
저자소개를 나중에 읽었다. 이상은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요양 중 기생 금홍을 만났다고 적혀있다. 날개의 주인공이 이상 본인 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왜 이토록 무기력했나 궁금하다. 그는 엄청난 수재였던 것 같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의 건축과 기수로 취직도 했다. 어떤 이상이 좌절 됐길래 자신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을까.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다.
전체 내용은 그냥 그랬지만, 몇몇 빛나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써놓고 한 번씩 들여다 보면 좋겠다 싶어 필사해 놓았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 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에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가 없고 한참 자고 깬 나는 속이 무명 헝겊이나 메밀껍질로 띵띵 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