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을의 전설>
8살이었나, 9살이었나.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그토록 오래전 일이다.
처음으로 영화 음악이 영화만큼이나 뇌리에 꽂힐 수 있음을.
외국 남자가 그토록 섹시(그때는 그냥 멋지다 잘생겼다 정도였겠지만)할 수 있음을 어린 내 머릿속에 박아준 영화, <가을의 전설>.
오래간만에 남편도 집에 없고, 여유자적한 금요일 저녁.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레 이 영화가 생각나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기를 시작했다.
사실 가을의 전설은 브래드 피트의 매력이 다 한 영화지만,
그보다 어린 내 마음에 와닿았던 건 브래드 피트를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하다가
결국 사랑을 이루고, 가장 행복한 시절에 떠나버리고 만... 영화 속 한 소녀 때문이다.
인디언 혼혈 소녀, 이자벨 2세. 그녀는 영화 중후반까지는 그저 스치는 등장인물 중 하나처럼 보이는데,
후반으로 가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된다.
어느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주인공 트리스탄을 길들이고 안정시켜준 유일한 여자로...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쭉 트리스탄(브래드 피트)만을 사랑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인 수잔나를 처음 만나는 씬에서 그녀는 커서 트리스탄과 결혼할 거라고 아주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땐 차마 몰랐지. 이 두 여자의 운명을....
이 영화는 아버지와 삼 형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가족 대서사시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물론 모든 편집과 스토리는 형제 중 둘째, 트리스탄을 향해 있지만 말이다.
1913년, 미국 몬태나 주 전쟁을 피해 평화로운 곳에 안착한 러드로우 대령과 세 아들 알프레드, 트리스탄, 새뮤얼. 유학을 떠났던 막내 새뮤얼이 약혼자 수잔나를 집으로 데려오며 고요했던 목장에 웃음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 아들 모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며 거스를 수 없는 슬픈 운명이 이들을 찾아오는데…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전쟁과 평화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 모두의 영혼을 울리는 대서사시가 다시 울려 퍼진다.
평화롭던 목장에서 행복한 삶을 살던 대령의 가족들.
그들의 평탄했던 일상은 막내 새뮤얼이 그의 약혼자를 소개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지루한 목장의 생활이 지겨웠던 어머니도 수년 전에 도시로 떠나버렸으니.. 시커먼 남자들만 살던 집에
아름답고 젊은 수잔나의 등장은 얼마나 싱그럽고도 설레는 일이었겠는가.
가족 모두가 그녀를 반겼고, 부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던 수잔나도 사랑하는 약혼자와 새로운 가족들을 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듯했다.
수잔나와 대령 그리고 삼 형제의 첫 만남에서 첫째 알프레드는 이미 수잔나에게 혼이 나간 듯..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는데 (누가 봐도 반한 눈이다...) 그러나 호감 그 이상의 어필은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그녀는 삼 형제 중 가장 사랑받는 막내의 여자이니까.
그리고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트리스탄의 등장...
여기서는 수잔나가 트리스탄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눈빛이 인상적이다.
왜 아니 그러 하겠는가. 이 영화에서는 모두가 트리스탄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목장에 도착해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수잔나.
그리고 운명처럼 만나는 두 여자.
바로 위에 말했던 이자벨 2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소개하는데 맹랑한 13세 꼬마, 이자벨 2세.
난 트리스탄과 결혼할 거예요.
당당하게 수잔나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다들 그 나이엔 그렇지 않은가.
어린아이의 풋사랑이라 생각한 수잔나는 '자신은 새뮤얼과 결혼할 것이니 우리 둘은 자매(형님 올케)가 되겠네.'라며 이자벨과 미소 짓고...(정말 사람의 시크릿 효과란..!)
목장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수잔나.
제법 말도 잘 타고, 총도 잘 쏘고... 세 형제의 사진도 찍어주면서 친해지는데..
하지만 눈치 없는 새뮤얼은 수잔나가 가족들과 친해지기 무섭게 세상 밖은 전쟁으로 난리라며...
전쟁 참전의 의지를 밝힌다. 형들의 보호만 받는 막내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영웅으로써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커 보이는 새뮤얼.
괜히... 막내가 전쟁 나가겠다고 난리 치는 통에... 가만히 앉아있던 형들도 막내 지키려고 함께 전쟁에 참전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그 와중에 수잔나는 트리스탄에게 새뮤얼의 전쟁 참전 의지를 꺾어달라고 부탁하게 되는데..
참... 타이밍 하고는... 슬퍼하는 수잔나를 위로해주다가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는 트리스탄과 수잔나..
두 사람도 모르게 이상한 끌림 같은 것을 느껴버린 것 같다.
그리고 하필 그 묘한 투샷을 보고 오해하는 알프레드...
안 그래도 수잔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 바쁜 알프레드인데...
트리스탄의 급발진에 기분이 상해버린 알프레드... 그렇게 서로 멀어진 채 전쟁에 참전하는 세 형제.
전쟁 참전 중에도 형들의 보호를 받는 새뮤얼은 자신이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지만,
형들 없이도 아버지처럼 전쟁 영웅으로써 입지를 다지고픈 어리석은 열정 때문에... 결국 사망하고 만다.
혼자 남은 수잔나...
빨리 그 목장을 떠나 새롭게 출발했다면 좋았을 텐데... 운명은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고.
제대한 알프레드는 수잔나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그녀에게 청혼하는데...
뭔가 아리송한 거절을 하며 조금씩 알프레드에게 마음을 여는가 싶은 수잔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트리스탄에게 수잔나가 올인해 버리면서.. 새뮤얼이 빠진 두 형제의 우애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온전히 수잔나를 뺏긴 알프레드는 도시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수잔나는 트리스탄과 공식 연인이 되는데...그녀의 눈에도 보는 내 눈에도 트리스탄의 사랑은 위태로워 보이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내 눈에도 그랬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도..
트리스탄은 정말 수잔나를 사랑했을까... 하고 의문이 드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트리스탄이 수잔나에 대한 이성으로써의 관심과 애정은 있었겠지만
새뮤얼을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인 것이 첫 번째 이유. 또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가 수잔나이기 때문에 이들이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트리스탄이 온전히 수잔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면
그에게 보이는 공허한 눈빛은.. 수잔나의 눈 속에 빛나는 별처럼 반짝임으로 대체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결국 수잔나를 목장에 남겨둔 채 방랑을 떠나는 트리스탄.
그리고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수잔나의 시간이 이어지는데...
기다리는 수잔나에게 편지로 자신을 기다리지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는 이별 통보를 하는 트리스탄.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형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수잔나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다시금 고백하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수잔나도 그런 알프레드를 거절하지 않고, 트리스탄의 형!! 새뮤얼의 형... 알프레드와 결혼해버린다.
결국 삼 형제 모두와 연인이 되는 쾌거(?)를 남긴 수잔나. 어쨌든 잘 나가는 알프레드와 결혼해 귀부인처럼 평온한 생활을 누리는가 했는데...
하지만!! 트리스탄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수잔나다.
넓은 세계를 방랑하다 돌아온 트리스탄. 새뮤얼을 잃은 슬픔은 극복하고 돌아온 것 같지만 이미 주변의 많은 것들은 변해있고. 쌩쌩하던 아버지마저 백발에 중풍으로 걸음이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거기에 자신을 영원히 기다릴 것만 같던 수잔나 역시, 형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트리스탄.
쇼크는 받았지만, 쉽게 체념하며 형과 수잔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트리스탄을 보면서
수잔나가 트리스탄의 인생에 그리 큰 의미는 아닌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 트리스탄에게 그녀는 찐 사랑일 수 있었지만 결국 아녔구나..
혹은 그는 너무 쿨한 건지도..)
그리고 드디어..
트리스탄은 자신을 온전히 기다리고 있던 성인이 된 이자벨을 만난다.
여동생 같은 존재였던 이자벨이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여자로 변신해있다니...
성인이 된 이자벨과 트리스탄의 마구간 만남 씬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굉장히 설레고 가슴 뛰는 씬이 아닐 수 없는데... 두 사람의 눈빛과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평생을 트리스탄만을 바라보던 이자벨의 꿈이 이루어지는가..
두 사람은 물 흐르듯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어...
결혼에 골인하고..
트리스탄의 인생 처음으로 가장 행복하고 평온하고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동생 새뮤얼의 이름을 딴 아들도 낳고, 귀여운 딸도 얻게 되는데...
오랜 시간 방황하던 트리스탄의 이 행복이 쭉 이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앞서 말했던 대로... 트리스탄의 평온함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트리스탄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가장 불행한 여자.. 수잔나..
그리고 가장 불행해진 트리스탄을 보면서 더 불행해져 버린 수잔나다.
삼 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지만..
결국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한 사람의 사랑만은 가질 수 없었던 수잔나.
그리고 우직하게 바보처럼 자신이 발전할 기회도 포기한 채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접지 않고 간절하게 기도하다, 결국 자신이 가장 원하는 남자의 마음을 가진 이자벨.
이 두 여자의 공통점은 한 남자를 애타게 사랑한 것이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이 품고 있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에 대한 확신의 깊이가
아녔을까.
물론 운명이라는 가장 큰 소용돌이는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자벨처럼 '나는 트리스탄과 결혼할 거예요'라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굳은 확신.
그리고 언젠가는 꼭 이루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돌고 돌아 트리스탄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유일한 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지.
그에 비해 수잔나는 처음부터 새뮤얼에 대한 사랑도 아슬아슬, 알프레드의 첫 고백에도 흔들, 연인인 트리스탄의 마음에도 늘 의심을 품고 불안해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올 트리스탄도 기다리지 못하고, 알프레드의 여자가 되어
놓쳐버린 트리스탄을 또또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망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갖는 일.
그것부터 시작되어야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0년이 지난(어우 세월..) 지금 보아도 여전히 설레고 아름다운 영화 <가을의 전설>.
어린 시절 내 시선 속 수잔나와 지금의 새로운 시선 속 수잔나가 다시 보이는 걸 보니..
(이자벨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짠하고 정이 간다)
좋은 영화는 보고 또 보고 또 볼 수록 새롭다.
10년 후에 또 다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