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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스윗 Jun 02. 2021

워킹맘의 출장, 그 짜릿한 자유

사실은 3살 아이보다 내가 더 울었네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인 나는 요즘 가끔 미치도록 출장을 가고 싶다! 이왕이면 해외출장이 더 좋을 것 같다. 하루에도 500번쯤 '엄마'를 불러대는 큰 아이로부터 벗어나려면, 한참 낯가림을 시작해 엄마 껌딱지 기질을 보이는 둘째 아이로부터 벗어나려면 출퇴근으로는 부족하다. 직장에서의 퇴근은 곧 가정으로의 출근 아니던가. 하룻밤만 큰 아이의 족발당수를 피해 혼자 침대에 누워봤으면... 하고 생각하다 4년 전 출산 후 첫 출장이 떠올랐다.


때는 첫째가 17개월에 접어든 2018년 5월 초. 직업상 출장이 잦았지만 출산 이후론 한 번도 출장을 가본 적이 없었고 복직 4개월이 되도록 일도 육아도 허둥지둥하던 때여서 워킹맘의 출장이란 아직 '미지의 영역', 소위 '슈퍼맘'인 사람만 할 수 있는 걸로 보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회사 내부 사정으로 미국 워싱턴 D.C. 지국에서 인원들이 철수하고 선배 한 명이 임시로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사상 초유의 기삿거리가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 한국과의 시차가 14시간이어서 메인 뉴스를 제작하려면 미국 현지에선 꼴딱 밤을 새워야 해 6.12 북미정상회담이 열릴때까지 관련 뉴스를 소화할 사람이 더 필요했다. 그 자리를 내가 운 좋게 제안받은 거다. 당시 나는 특정 출입처가 아닌 기획부서 소속이어서 당장 자리를 비워도 뉴스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을 사람이었고, 힘든 일에 부려먹기에 연차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 그랬던 것 같다.


처음 선배에게 제안을 받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임시직이긴 하지만 이렇게 기사가 집중되는 때에 워싱턴 특파원 대타라니! 나중에라도 내가 경쟁이 치열한 특파원직에 발탁될 확률이 '지극히 낮은'걸  감안하면 두 번 생각할 게 아니었지만 바로 대답을 못했다. 17개월 된 아기를 두고 5주 이상 집을 비워야 하니 그동안 남편이 독박 육아를 감수해 줄 것인지, 어린이집에 안 가는 주말에는 친정과 시댁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파악해야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참으로 모양이 빠지지만 선배에게 '아이가 어리니 가정 내에서 일단 상의해보겠다.'라고, '제안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라고 말씀드렸다.  입사 십여 년 만에 가장 흥분되는 출장 기회를 잡았는데, 출장 여부를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솔직히 좀 서글펐다.

아장아장 걷고 뛰고 연습을 하던 만 16개월 어린이. 한 달 이상 떼어놓기엔 너무 꼬꼬마이긴 했다.

혹시 남편이 난색을 표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말자, 다짐하며 전화를 걸었다. 이만저만한 제안을 받았고 나는 많이 가고 싶지만 아이가 어리니 못 가게 되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겠다, 회사 입장에선 내가 가부를 빨리 결정해주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그러자 남편이 2초쯤 뒤에 대답했다. "그걸 안 간다고? 바보야? 당연히 가야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뉴스가 나오는 곳인데!" 하룻밤만 생각해보자는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바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와 살짝 당황했다.  "음? 정말 가라고? @@이는 어쩌고? 매일 등원시키고 매일 밤 혼자 데리고 자야 하는데 괜찮겠어?" "어떻게든 보지 뭐. 아침에 등원만 시키면 어린이집에서 봐주고, 하원한 뒤에는 숙모님이 8시까지 봐주시잖아." "정말이야? 이거 무르는 거 아니지? 나도 회사에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어."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은 "남편 자랑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입장 바꿔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남편도 해외 출장을 결정할 때 과연 나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했을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막혔지만 코로나 이전에 남편은 거의 분기에 한 번씩, 1-2주짜리 해외출장을 갔다. 물론 나처럼 '내일이라도 당장 가라.'는 식의 즉흥적인 게 아니라 본인이 주도적으로 일정을 조율해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전 고지했지만 '아내가 난색을 표할 수도 있다.'는 식의 생각은 거의 안 했을 거다. 왜일까. 왜 나는 괜히 제 발을 저렸을까. 하늘이 두쪽 나도 TV 뉴스가 안 나오는 날은 없기에 정기적으로 주말 근무를 하면서 남편에게 독박 육아를 시키며 늘 빚지는 기분으로, 아이에겐 늘 미안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관성에 감히 출장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일까.


출국 날조차 어린이날 하루 전인 5월 4일, 참 기가 막히는 날짜였다. 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진다는 게 막막했고, 남편한텐 미안했고 멀리 떨어진 친정 부모님보다 더 큰 육아 부담을 질 게 뻔한 시부모님도 신경 쓰였다. 미국에 도착한 뒤 처음 며칠 동안은 퇴근 후 아침에 (한국에선 저녁) 시간을 정해 열심히 아이와 영상 통화를 했다. 처음엔 '엄마 엄마'하면서 반기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화면을 보지 않거나 내 시선을 회피하며 못 본 척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상통화를 해도 엄마가 진짜로 나타나진 않으니까 미워서 그러나 싶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이 이름을 불렀다. 보다 못한 남편은 아이랑 영상 통화하며 속상해하지 말고 그 시간에 쉬라고 했다. 그러면서 간간히 보내주는 영상들은 정말 가슴이 찢어졌다. 내가 두르던 스카프를 껴안고 엄마를 찾거나, TV에 내 얼굴이 나오면 뛰어가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아, 비염 때문에 질질 콧물까지 흘리고 있어 정말 불쌍해 보였다.

TV를 보며 열심히 엄마를 부르던 아이

그래서 내가  달여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 잠을 자니 어찌나 호텔방이 무섭고 삭막하던지. 혼자선 외식을 하고 싶어도 패스트푸드 정도나 먹을  있어서 (미국에서 정찬을 먹을  있는 식당은  고급스럽고, 팁도 비싸고, 혼자 가기도 민망하다.) 거의 매일 한인마트에서  3 요리와 햇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가끔 쉬는 날이 주어지면 혼자서 구경이라도 다닐 법했건만, 아이와 남편을 내팽개치고 혼자 외국에서 호의호식하면  된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TV 봤다.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된다. 잠을 줄여서라도   정력적으로 현지 취재원들을 만나고 구경도 했어야 했다!) 이틀에  번씩 한국 시간에 맞춰 꼴딱 밤을 새우는 야근을 해야 했는데, 수면시간 조절이 너무 힘들어 거의 매일 멜라토닌 보충제와 와인  잔을 마시고 3-4시간 토막잠을 잤다. 그래도  아닌 다른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고  일과  끼니만 걱정하면 된다는  정말 짜릿하게 좋았다. 자유, 출산 이후 처음으로 누려보는 자유였다!

H마트 없었으면 정말 많이 굶었지 싶다. 거의 모든 종류의 3분 요리를 다 먹어봤다. 김치도 꽤 맛있었다.

40일쯤 되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남편이 인천공항에 아이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 입국장에서 아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아이는 여전히 나를 외면하며 아빠를 찾았다. 재접근기에 엄마가 집을 비운 터라 애착에 문제가 생긴 걸까, 물 건너온 빠방 선물을 들이밀며 애정을 구걸한 지 열흘쯤, 아이는 다시 예전처럼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애착 재형성이 너무너무 잘 됐나. 큰 아이는 요즘도 모든 일을 아빠가 아닌 엄마와 하겠다고 떼를 쓴다. 징글맞고 사랑스러운 나의 의무이자 책임인 아이들. 회사엔 출장도 있고 휴가도 있는데, 육아엔 출장만 있고 휴가는 없다.(가족여행이라는 건 여행의 탈을 쓴 출장 육아이자 극기훈련일 뿐이다.) 아. 복직하면 궂은일에 먼저 손들고 힘든 출장길을 자처해야지 생각하다, 아이가 둘이니 육아 함수가 더 어려워져 더 힘들겠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그러면 얘들아. 엄마한테 제발 하룻밤 휴가라도 줄 수 없겠니? 너네 시중 안 들면서 우아하게 밥 한 끼 먹고, 너네 발에 안 차이면서 하룻밤만 자보고 싶구나.


. 남편은 아직도 2018년의 장기 출장에 대해 가끔 이야기한다. 자신의 탁월한 판단과 신속한 결정으로 아내에게 중요한 출장 기회를 보장해줬다는 자화자찬이다.  웃기긴 하지만 인정할  인정한다. 덕분에 TV에서만 보던 백악관 로즈가든도 울타리 밖에서나마 구경했고 싱가포르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질문을 받은 기자회견장에도 들어갈  있었다. 남편이 만약 브런치에 육아를 주제로 글을 쓴다면 아마 시작은  시절 독박 육아기가   같다. 가끔 우울할  남편이 첫째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있던 사진을 찾아보면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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