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지만 꽉찬 아빠의 사랑
아빠가 싸주는 도시락 반찬이 좋았다. 급식이 없던 고등학교 초반까지는 도시락을 싸갔다. 엄마가 회사 연수로 자리를 비우면 이따금 아빠는 늘 내 도시락 반찬을 햄과 비엔나소시지, 냉동 떡갈비 위주로 채워주었다. 그러면 나는 입안에 가득 차는 가공육의 질감만큼이나 꽉 찬 행복을 느끼곤 했다. 엄마는 매번 나물이나 손이 많이 가는 건강한 반찬 위주로 싸줬지만 정확하게 어떤 반찬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싸준 반찬들만 생각나는 걸 보면 나는 그때가 더 신났던 건 분명하다.
고3 때 평소 50kg대의 몸무게에서 70kg에 육박하는 최고치 몸무게를 찍었다. 변명하자면 다 아빠 덕분인데 집에는 늘 마트에서 집어 온 박스에 온갖 과자와 빵과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수북했다. 눈에 보이니까 먹는다고, 그 당시 나는 밥을 먹고서 빵을 먹고 과자를 먹는 게 한 끼의 완성이었고, 일 년 내내 매끼를 그렇게 먹어댔다.
나름 청소년기라 나는 아빠와 말이 거의 없었고 의도적이며 간헐적으로 엄한 아빠를 무서워했는데 엄마에게 아빠가 마트만 가면 늘 내 간식부터 어찌나 챙기는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무심하게 쌓여있던 과자가 아빠가 사둔 거라니. 가족 중에 그 간식을 먹는 사람은 주로 나였고, 엄마 아빠 중에 누가 샀다는 생각은 안 해봤던 터였다. 소시지 반찬도 잘 안 싸주는 엄마가 과자를 이렇게 살 리는 없었고, 무뚝뚝했던 아빠가 산더미 같은 과자를 샀다는 걸 당시에는 머리에까지 입력이 잘 안됐다. 그냥 먹고 책상에 앉는 일에만 집중했다.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아빠와 나는 나름 괜찮았던 부모와 자식의 시기별 관계 거리를 형성했던 듯했다. 어렸을 땐 부모와 가까웠다가 청소년기엔 거리를 뒀다 성인이 되어선 다시 부모와 가까워지는 그런 패턴을. 30대가 되어 좀 더 가족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나는 아빠가 심지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고, 서른 후반의 어느 날엔 바쁜 와중에 빈 회의실에 들어가 받은 전화에서 아빠는 나에게 ‘우리 딸 사랑해’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었다. 그날의 통화가 아빠와 마지막 주고받은 대화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며칠 후 나는 본가의 주방에서 박살이 나버린 아빠의 도시락통을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깨진 반찬통들은 플라스틱 파편과 음식물이 뒤섞여 끔찍한 사고 현장을 짐작하게 할 정도였다. 커다란 보냉 주머니 안엔 찌그러진 스탠 밥통과 주로 젓갈과 빨간 양념인 각종 반찬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풍비박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반찬은 열 가지가 넘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의 종류나 담긴 모양을 보니 아빠가 직접 도시락을 쌌구나 짐작이 됐다. 대부분 남루했고,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동생과 내가 본가에 가 있을 때만 반찬이 풍성해진다며 엄마에게 투정 부렸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에겐 늘 박스가 넘치는 과자와 간식을 주려 했고,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와 떡갈비를 반찬으로 채워줬으면서 당신 도시락은 늘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먹다 남은 반찬만 싸다녔던 걸까. 아빠의 사랑은 영양에는 서툰 소시지 반찬 같다. 스스로에겐 인색하고 가족에겐 헌신하고, 고3 딸의 체중이 심각하게 늘든 말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먹는 즐거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듯. 입 안에 꽉 찬 소시지 반찬을 먹던 그날의 행복을 기억한다. 곁에 없어도 여전한, 없어서 불완전한듯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꽉 차는 사랑을 왜 인지 아직도 느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