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네 Oct 19. 2023

도시락 반찬

서툴지만 꽉찬 아빠의 사랑


아빠가 싸주는 도시락 반찬이 좋았다. 급식이 없던 고등학교 초반까지는 도시락을 싸갔다. 엄마가 회사 연수로 자리를 비우면 이따금 아빠는 늘 내 도시락 반찬을 햄과 비엔나소시지, 냉동 떡갈비 위주로 채워주었다. 그러면 나는 입안에 가득 차는 가공육의 질감만큼이나 꽉 찬 행복을 느끼곤 했다. 엄마는 매번 나물이나 손이 많이 가는 건강한 반찬 위주로 싸줬지만 정확하게 어떤 반찬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싸준 반찬들만 생각나는 걸 보면 나는 그때가 더 신났던 건 분명하다.


고3 때 평소 50kg대의 몸무게에서 70kg에 육박하는 최고치 몸무게를 찍었다. 변명하자면 다 아빠 덕분인데 집에는 늘 마트에서 집어 온 박스에 온갖 과자와 빵과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수북했다. 눈에 보이니까 먹는다고, 그 당시 나는 밥을 먹고서 빵을 먹고 과자를 먹는 게 한 끼의 완성이었고, 일 년 내내 매끼를 그렇게 먹어댔다.


나름 청소년기라 나는 아빠와 말이 거의 없었고 의도적이며 간헐적으로 엄한 아빠를 무서워했는데 엄마에게 아빠가 마트만 가면 늘 내 간식부터 어찌나 챙기는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무심하게 쌓여있던 과자가 아빠가 사둔 거라니. 가족 중에 그 간식을 먹는 사람은 주로 나였고, 엄마 아빠 중에 누가 샀다는 생각은 안 해봤던 터였다. 소시지 반찬도 잘 안 싸주는 엄마가 과자를 이렇게 살 리는 없었고, 무뚝뚝했던 아빠가 산더미 같은 과자를 샀다는 걸 당시에는 머리에까지 입력이 잘 안됐다. 그냥 먹고 책상에 앉는 일에만 집중했다.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아빠와 나는 나름 괜찮았던 부모와 자식의 시기별 관계 거리를 형성했던 듯했다. 어렸을 땐 부모와 가까웠다가 청소년기엔 거리를 뒀다 성인이 되어선 다시 부모와 가까워지는 그런 패턴을. 30대가 되어 좀 더 가족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나는 아빠가 심지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고, 서른 후반의 어느 날엔 바쁜 와중에 빈 회의실에 들어가 받은 전화에서 아빠는 나에게 ‘우리 딸 사랑해’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었다. 그날의 통화가 아빠와 마지막 주고받은 대화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며칠 후 나는 본가의 주방에서 박살이 나버린 아빠의 도시락통을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깨진 반찬통들은 플라스틱 파편과 음식물이 뒤섞여 끔찍한 사고 현장을 짐작하게 할 정도였다. 커다란 보냉 주머니 안엔 찌그러진 스탠 밥통과 주로 젓갈과 빨간 양념인 각종 반찬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풍비박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반찬은 열 가지가 넘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의 종류나 담긴 모양을 보니 아빠가 직접 도시락을 쌌구나 짐작이 됐다. 대부분 남루했고,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동생과 내가 본가에 가 있을 때만 반찬이 풍성해진다며 엄마에게 투정 부렸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에겐 늘 박스가 넘치는 과자와 간식을 주려 했고,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와 떡갈비를 반찬으로 채워줬으면서 당신 도시락은 늘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먹다 남은 반찬만 싸다녔던 걸까. 아빠의 사랑은 영양에는 서툰 소시지 반찬 같다. 스스로에겐 인색하고 가족에겐 헌신하고, 고3 딸의 체중이 심각하게 늘든 말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먹는 즐거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듯. 입 안에 꽉 찬 소시지 반찬을 먹던 그날의 행복을 기억한다. 곁에 없어도 여전한, 없어서 불완전한듯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꽉 차는 사랑을 왜 인지 아직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