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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Feb 06. 2024

아빠와 손 잡고 여행


아빠와 가는 나들이가 좋았다. 새로운 곳에 가보는 걸 좋아하는 성향은 아빠와 내가 닮아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면서는 학업도 마무리 짓고 직장도 자리를 잡아 여유가 생겼다. 그 무렵, 혼자 먼 나라 여행을 다니다 뒤늦게 철이 든 건지 부모님과 그 즐거움을 함께하고 싶어졌다. 국내 여행도 가족과 가끔 다녔지만, 해외여행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부모님도 누렸으면 했다. 특히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호기심 많은 아빠도 즐거워할 게 분명했다.


처음 아빠는 굳이 돈을 들여가며 해외를 가는 일에 (아마도 미안해서) 주저했지만, 한 번 가고 나서는 은근히 기대하셨고 나중엔 나이도 드셔서 그런지 (즐길 날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꼈던 건지) 좀 더 편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기대하는 모습을 보일 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짠하면서도 행복했다.

 



해외여행은 당연히 (내 입장에서는) 여유가 있어서 가는 건 전혀 아니었다. 정확히는 여유가 없어도 억지로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 그러니까 부모님이었기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행히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매달 월급에 의지해 다음 달의 나와 그다음 달의 나, 그 다음다음 달의 나까지 힘을 모아 주도해서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해맑은 웃음이 좋았다. 해외여행을 가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삶의 무게 때문인지 해외여행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한 미소가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바다나 수영장에서 물놀이할 때 아이처럼 웃는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처음 봤다. 그때 알았다. 내 부모님의 얼굴에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숨어있었다는 걸. 삶의 무게 따윈 애초에 없었던 듯한. 본연의 맑음을 그렇게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첫 해외 여행을 앞둔 새벽, 어렴풋한 기억에 잠이 깼다. 중학교 국어 시간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하고 싶은 일이나 소원을 써보고 각자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돌아온 선생님의 대답은 네가 무슨 수로 부모님 해외여행을 보내드리냐는 거였다. 나를 잘 모르는 무난한 선생님이었다. 별다른 앞뒤 정황도 없었는데 학우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 그날 일은 큰 상처가 됐지만,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하필 첫 해외 여행을 가는 날 새벽에 그 기억이 튀어나올 줄이야. 그만큼 부모님과 멀리 떠나는 여행은 무의식적으로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라 더 애틋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난 다음 날, 30도가 훌쩍 넘는 더운 나라의 야외 테라스에서 조식을 먹게 됐다. 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갔건만 쾌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리고 옆자리에서 유난히 많은 땀을 뚝뚝 흘리며 조식을 먹는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불평할 만도 했는데 가이드의 사전 설명이 있어서 그랬는지 묵묵하게 더위를 참고 밥을 드셨다. 더위를 유독 많이 타는 아빠였는데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다른 여행에서 딱 한 번 쾌적하고 시설 좋은 마사지 샵에 모셔갔었다. 보통 패키지여행에 포함된 마사지 샵은 그다지 쾌적하지 못했다. 잠깐 주어진 자유시간이 있어 급하게 찾아간 곳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짧은 마사지 코스였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안락함이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샵을 나오면서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빠는 말했다, ‘우리 딸 고마워’. 본인들은 직접 이런 곳을 갈 일이 없다는 걸 알기에 신경 썼던 딸의 마음이 느껴졌나 보다. 온화한 한마디에 나 역시 아빠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한 해외여행은 고작 몇 번에 불과했다. 늘 동트기 전 새벽부터 집을 나서느라 이른 밤 술로 잠을 청하던 아빠. 한 날도 빠짐없이 기상했던 성실함의 무게만큼 삶이 무거웠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 아빠가 태평양 바다를 다 밟아본다며 출세했다고 혼자 조용히 감탄했던 때가 가끔 생각난다. 백사장에 앉아 드나드는 파도를 맞으며 양손으로 모래를 모아 떨어뜨리고는 아이같이 좋아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선 옆에 앉은 내 손을 꼭 잡고 우리 딸이랑 노니까 이렇게 좋네 라며 작게 읊조렸던 목소리도.


혼자만 다니던 먼 대륙을 꼭 한번 밟게 해주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였던 여행을 회사 일정 때문에 아빠와 함께하지 못했는데 그 일로 한동안 회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 일이 마음에 남았다.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일을 자책했다. 혼자 남은 엄마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나고 아빠가 없는 아빠 고향을 더 많이 가면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몇 년 후, 결혼을 했고 부부 상담을 받았을 때였다. 검사지에 아빠에 대한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적는 란이 있었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고 썼다. 검사 결과를 들으며 알게 되었는데 보통 이성 부모와의 미해결 과제를 배우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저 남편과 더 많이 놀러 다니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정말 아빠와 미처 다하지 못한 추억 쌓기를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남편은 부부 상담 후로 바깥 활동을 크게 즐기지 않는 성격이지만 고맙게도 나를 배려해서 여기저기 다니려고 애써주고 있다.




중학교 시절의 그 꿈을 꿨던 날, SNS에 기록을 남겼었다. 나이 많은 지인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무늬로 자리 잡게 된다고 댓글을 남겨주었다. 언젠가의 상처나 회한도 풍화작용처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면서 그 나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딘가에 있을 아빠의 아쉬움과 상처도 바람에 섞여 조금은 더 편안한 모습이길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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