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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Mar 11. 2024

유산 닷새 째, 스타벅스에서 울어버렸다.

포용하는 마음


달달한 케이크를 꼭 먹고 싶었다. 몸에 필요했는지 마음에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일 인분의 맛있는 케익을 먹기에 스타벅스는 딱 좋은 선택지였다.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소파에 앉은 두 살배기 딸과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모습을 보자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모습일’ 수 있던 내가 거기에 있었다. 찰나지만 상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가 아렸다. 상실감으로 부풀어 오를 무렵 진동벨이 울렸다.


사람이 많지 않은 3층에 자리를 잡았다. 한두 시간쯤 지나고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버거웠지만 주변에 유산 사실을 알리고 정리를 해야 했다. 닷새가 지나 마음은 어느 정도 추스른 상태였다. 배는 아직 얼얼했지만 늘 그랬듯 마음의 회복은 빠르게 다스렸으니까.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전화를 자주 하지도 않았는데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일 텐데. 전화를 받기도 전에 친구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됐다.




자주 말을 잇지 못했고 탄식이 길었다. 말문이 막힌 친구를 마주하니 진료실에서 유산을 통보받았던 심정이 상기됐다. 조금 전까지도 잔잔했던 마음이 요동쳐 당황스러웠다. 겨우 전화를 끊었지만, 친구가 몰고 온 슬픔은 성난 파도 같았다. 격한 파장이 순식간에 마음을 덮쳤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됐는데 그 많던 휴지는 왜 하필 하나도 없는 건지. 아직 걷는 것도 배가 당기고 불편해서 2층 화장실까지 곧장 가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얼굴을 가려주는 노트북에 바짝 기댔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와중에 항복하듯 인정했다, 아직 마음도 몸만큼 괜찮지 않다는 걸.



두 달 후, 우연히 난임과 유산에 관한 책 <난임과 유산에 대처하는 심리 가이드>(에이미 웬젤, 이승재 외 번역, 심심)를 읽었다. 책에는 유산 후 시기별로 겪는 마음의 변화와 대처해야 할 상황, 마음가짐 등에 대해 다양하게 가이드를 안내했다. 이미 내가 겪었거나, 하고 있던 것들도 있었다. 소소한 성취에 몰두했던 일들도 그제야 이해했다. 무엇보다 가장 위로받은 내용이 있었다. 저자는 미국의 유명 임상심리학자이자 21주 차에 유산을 겪은 주산기(출산 전후의 기간) 여성 심리전문가로 많은 연구와 상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유산 경험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라고 했다.



‘여성의 나이, 임신 기간, 이전 유산 경험, 투자 시간과 금액도 변수지만, 한 개인이 임신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그 경험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임신에 심리적 감정적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유산이나 외상 경험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모두 각자 다른 자신만의 과거나 ‘마음속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성장 과정에서 겪은 상처가 임신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고, 누구는 임신 전 개인 사정이나 목표, 기대가 중요한 문제로 걸려있을 수도 있었다.


책으로 사려깊은 배려를 받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늦은 결혼 후,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임신 전엔 작은 결과물이라도 내야 한다는 초조함이 있었다. 임신과 출산이 시작되면 못해도 몇 년 동안은 황금 같은 시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컸다. 기다렸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이었다.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반기지 않는 당혹스러운 마음도 자리했다. 임신을 고대했던 이들 마저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 달간 차츰 몸도 마음도 임신에 익숙해질 무렵, 갑작스러운 이별은 너무나 쉬워서 어려웠다. 이미 활짝 펼쳐진 마음은 억지로 오므려지지 않았다. 임신을 기다렸던 남편과 태아에겐 미안함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두 달간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 유산이라 금방 괜찮아져야 했다. 흔한 거라 너무 슬픔에 빠져있으면 안됐다. 나중에 잘못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야 했다. 걱정해 주는 진심도 잘 알기에 고마웠다. 나 역시 그렇게 말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위로는 결국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들과 나는 달랐다. 나이도 많았고, 다시 임신한다 해도 유산이나 기형에 대한 불안도 내내 안고 가야 할 게 더 확실해졌다. 일 년에 유산을 세 번이나 했다는 유명인의 이야기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첫째는 있지 않나 하는 삐죽한 마음이 일었다.


책에서는 통계치를 인용하지 않았다. 저자는 본인의 자녀 유무도 책에서 밝혀야 할지 끝까지 고민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슬픔에 빠져있을 땐 비슷한 상황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자신의 상황이 더 절망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쪽으로 미묘하게 차이를 찾아낼 수도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너도 이렇게 괜찮아질 거라는 방식의 위로보단 새로운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틀을 얻도록 책은 안내해 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사려깊은 책이었다.



나조차도 큰일이 아닌 것처럼 치부했던 내가 보였다. 너보다는 크고, 저보다는 작은 슬픔은 없었다. 나만 알 수 있는 커다랗고 유일한 슬픔, 단 하나의 슬픔만 있었다. 그제야 마음놓고 슬퍼했다. 내가 내 슬픔을 알아봐 주었다. 비로소 슬픔의 뿌리까지 보듬어진 것 같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니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늘었다면 내 마음을 돌본 결과의 확장일지 모른다고 느꼈다, 스타벅스에선 조금 더 마음놓고 울어도 됐을 거란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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