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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Apr 22. 2024

비 오는 날의 감자수제비

요리는, 아마도 사랑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도 고민한다. 오늘 저녁엔 무얼 먹을 것인가. 종일 비 오는 창밖을 바라봤더니 뜨끈한 국물이 당기네. 간만에 감자수제비를 먹어볼까.


남편에게 오늘의 메뉴를 알리고서 밀가루를 덜어 그릇에 담았다. 물을 머금은 반죽이 묵직해질 무렵 한 손으로 치대기 무거워 양손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뻑뻑한 반죽 탓인지 한 줌 한 줌 치대는 게 무거워져 힘들었다. 내가 왜 이 번거로운 수제비를 한다고 했을까. 아주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감자수제비가 아니라면 또 무얼 먹어야 할 것인가.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으므로 다시 감자수제비를 떠올려보니 보슬보슬한 감자와 쫄깃한 수제비에 청양고추를 넣은 양념장의 조합이 이보다 훌륭할 순 없다.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후다닥 만들고 준비하는 것쯤이야.



하루의 끝에 남편과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것. 신혼인 데다 일과에서 그것만큼 중요한 게 뭐가 더 있을까 하는 마음에 웬만하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을 분배해 둔다. 물론 여력이 되지 않을 땐 어쩌다 배달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식비도 아낄 수 있는 데다 만드는 재미도, 맛있다고 하면 보람도 있어서 간단하게라도 요리하는 편이다.


가끔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때는 번거롭게 요리를 하진 않는다. 남은 음식으로 때우거나 샌드위치를 사 와서 먹거나. 혼자 먹는데 굳이 설거이 더미가 나오는 요리를, 굳이 식재료 수급을 앞당기는 작업을, 또는 같이 먹으면 좋겠다 싶어 주문한 재료들을 혼자 먹기엔 아깝고 어딘가 효율이 나는 것 같지가 않다.


혼자 살 땐 주로 퇴근길의 시장 골목에서 떡볶이와 튀김으로 저녁을 해결하는 날이 많았다. 주말엔 집 근처 밥집에서 간단하게 먹거나 포장 음식을 싸 오기도 했고. 엄마가 사준 8인용 밥솥은 딱 한 번 사용한 채로 무용지물이 됐다, 그것도 이사 첫날 엄마가 썼다. 20대 때는 원룸에 옵션으로 있던 미니 냉장고를 서랍으로 썼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날도 있었다.




몇 해 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땐 일주일에 한 번씩 본가를 찾았다. 멀리 떨어져 살던 나는 엄마가 걱정돼 한동안 먼 길 다니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냉장고 안을 볼 때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만들어둔 음식들과 반찬통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재료들은 썩은 채 방치돼 있었다. 엄마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듯해 먹먹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음식을 너무나도 잘 먹었고, 엄마는 요리를 너무나도 잘했다. 먹는 데 기쁨을 느끼고, 요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두 사람은 환상적인 집밥의 궁합을 자랑했다. 뭐든지 잘, 많이 먹는 남편을 둬서였는지 엄마는 아빠를 보내고도 한동안 평소처럼 많은 식재료를 사다 날랐다. 요리하는데 기본이라 상시 구비가 필요하다는 파나 양파, 고추, 당근, 무, 콩나물, 고기 등을. 카트에 가득 담긴 식재료를 보고도 나는 차마 아빠의 부재를 상기시켜 줄 용기가 없었다. 누가 봐도 직장 다니는 자취생처럼 살 게 뻔했고, 식재료의 앞날도 훤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사 온 재료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썩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구입하는 식재료의 양을 줄이지 못했다. 말없이 지켜보며, 사십여 년간 몸에 익은 익숙한 일과를 스스로 시간을 보내며 줄여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사 년이 지난 지금은 일인 가구의 살림에 적응한 듯하다. 혼자 먹을 요리 위주로 식재료 구매 요령도 생긴 듯하지만, 동생네와 우리 부부가 모두 모이는 날이면 이전 같은 큰 손의 저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곤 한다.  




멸칫국물을 다 우려낼 때쯤, 씻고 나온 남편은 간만에 맡아보는 멸치육수 향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한술 뜨고는 언제나처럼 정말 맛있다며, 수제비는 먹고 싶지만 준비 과정이 번거로워서 자주 해달라고 하기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만 먹고 싶어 한 게 아닌 게 했는데 같은 마음이었다니 별거 아닌 일에 기분이 좋다. 같이 맛있게 먹어서 더 즐겁다. 삼십 분의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들여도 좋다는 생각을 따뜻한 감자를 입안에서 굴리며 잘게 으깨는 내내 했다.


요리는 그야말로 사랑인지 모른다, 정확히는 상대가 있는 사랑. 혼자서는 귀찮아도 챙겨줄 사람이 있어야 수고스러움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하나의 애정 표현 방식.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먹을 때라고 했나. 주기만 하는 것 같지만 맛있다는 화답엔 내가 받는 것 같은 보람과 뿌듯함도 느끼니 엄마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별거 아니지만 결국엔 작아서 더 빛나는 별거. 우리를 살고 또 기억하게 하는 작은 순간들의 반짝임을 매일 저녁 음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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