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구름, 중형급 구름의 흰구름들이 가을하늘을 유영하던 9월 22일, 시인 이병률의 강연을 들었다. 중랑구립도서관에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얼굴 대면은 처음이다.
왜 시인이 되었을까? 시인은 많은 이들이 책이 아닌 시인의 입에서 듣고 싶은 말들을, 목마른 이를 해갈하게 해주듯 서슴없이 내놓았다.
서두에 시인은 그랬다. 내성적이어서 시인이 되었다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하고 친해지고 싶은 것이 시 쓰기에 적절한 성향인 것 같다고 고백했다. 자기로서는 “시를 어렵게 쓰고 싶다”고 진심 어린(!) 농치기도 한다. 또 시인(작가)이 되려면 ‘뻥이 많아야 한다’고도 했다. 내 마음속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선 100프로가 아닌 120프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될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참 가슴에 와닿았다. 산문 쓰기에서 내가 자주 하는 짓이기에.
시를 읽는 이유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병률 시인은 다른 이의 심장에 진동(감동)을 일으키는 글을 싶다고 했고, 독자들이 그 진동을 느껴주기를 바란다 했다. 그렇게 시는 우리 뇌를,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에, 그 시는 또 어떤 책은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주기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예를 하나 들었다. 핀란드 학교에서 초·중·고 1교시는 무조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시간이라고 했다. 날씨가 춥든 덥든 상관없다.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뛰어놀면 아이들의 머리가 열린 상태가 된다. 그다음 2교시, 3교시 수업을 하고 귀가한다. 이병률 시인은 시가 이 1교시 같은 역할을 한다고 부연했다.
시 쓸 때와 산문 쓸 때의 마음가짐, 자세를 질문했다. 그랬더니 시를 쓸 때 열 배(백 배?) 더 기쁘다고 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속내를 드러내듯 하고 싶을 때 산문을 쓴다고 했다. 산문을 쓰는 나로서는 약간 주눅 들긴 했지만 그 마음을 이해한다.
시를 다시 읽게 될까. 지난달 기행반 모임의 ‘작품론’ 발표 의무도 있어 구상 시인의 시를 잔뜩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시에 대한 애정이 살아났다. 한참 잠잠한 상태를 보내다, 강연 듣기 며칠 전 시를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내가 소장한 시집 중에 마종기 시인의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를 꺼냈다. 첫 번째 시 한 편을 읽고 지금도 대기 중! 사실은 '축제의 꽃'이라는 그 시가 좋아 다시 읽고 멈춘 것이다. 그런데 이병률 시인이 말하길,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성장했단다. 기분 좋은 우연!
‘끌림’
"엉뚱하게도 나는 그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 어렵게 쓰고 싶다고 하니 그의 시를 읽게 될까 저어한(?) 마음이 든다. 대신 시인의 산문집은 읽었다."라고 이 글을 처음 올릴 땐 이렇게 썼다. 그런데 수정해야겠디. 내 책장에서 그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를 어쩌나... 그런 그렇고 다른 사연이 있다. 시인의 산문집 《끌림》 2005년 초판을 2005년에 읽고 ‘오마이뉴스’에 서평으로 올린 적이 있는 것이다. 그 서평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내 글이 인상적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주책을 부렸다.
나는 그의 책 《끌림》을 읽고 나서 그가 친절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조용하고 쿨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강연장에서 시를 알려주는 방식과 행동이 정말 친절했다. 자기 시와 타인의 시를 빔 프로젝터로 띄워 일일이 읽어주고 조목조목 설명을 보탰다. 내가 보기에 그는 다른 시인의 시에서 보석을 찾아내 알려주는 감별사였다. 그리고 강연 듣기를 잘했구나 싶을 정도로 위에 소개한 내용 외에도 '끌림'이 있는 발언들이 많았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은 개정판이고 2016년 현재 38쇄를 찍은 장기 베스트셀러다. 이 책엔 여행가, 사진가이기도 한 이병률 시인의 시적인 사진이 가득하다. 나는 나의 주책을 이어갈 요량에 2005년 판의 서평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개정판을 읽어도 내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용을 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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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 해찰하기 그리고 끌려가기
--이병률의 《끌림》 서평
사진과 글의 조합, 그건 아주 즐거운 작업이다. 내 경험으로는 사진은 글을 뒷받침해주고, 글은 사진을 여러 번 쳐다보게 한다. 아주 죽이 잘 맞는 한 쌍이라고 할까. 그건 한 사람의 작업일 때도, 두 사람의 작업일 때도 마찬가지다.
미셀 투르니에와 에두아르 부바의 공동 작품 <뒷모습>은 아주 훌륭한 사진과 글의 조합이다. 신문기자와 사진기자의 작업에 비할 바 못 된다.
<뒷모습>의 글쓴이와 사진작가는 각자 독립적으로 작업하며 다른 세상을 꾸려나간다. 선구자는 사진작가다. 사진작가가 제시한 이미지에 글쓴이는 대강의 아우트라인만으로 접근할 수 있기에. 그러나 사진에서 비롯할 상상력은 글쓴이에 의해 제한당할 수밖에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이런 책은 사진을 먼저 보고 글을 읽어야 예의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 사진 찍고 글 쓰면 이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진작가로만 살 바가 아니라면.
이병률은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무척이나 많이 돌아다녔다. 시인이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나오게 되나 보다. 시인으로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시어처럼 사용하고 배치했다.
그는 끌리는 것이 많다. 수없이 해찰해서 그럴 것이고 그 해찰거림은 일종의 병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 표현대로 "눈참견도 빼놓지 않는다." 뻔질나게 "하체를 가동"하면서. 그런데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끌리는 것이 많다. 일상의 소소한 발견을 우리는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익숙한 곳에서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덮개를 씌우지 않았는데도 알아채지 못한다. 내 주변의 '끌림'의 대상은 그래서 외부인이 발견해 주는 경우가 많다. 이병률처럼 떠다니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에게 내가 사는 곳이 여행의 장소가 될 것이기에.
그러나 누구나 여행을 간다고 다 '끌림'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 대상은 관광의 타깃이 되고 정형화된 설명으로 소개되기에 많은 이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수긍한다. 그래서 여행은 그것이 뭔가를 찾아가는 경우라면 혼자서 가는 것이 좋다. 그러면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끌림'의 주체는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타지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사실 내게 익숙한 집과 동네에서도 늘 있어 왔던 것이다. 집을 떠나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너 속에 있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너를, 우리 속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래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멀쩡한 집을 놔두고 여관에 투숙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유는 다른 데 있지만(지겨운 일상의 회피), 그렇게 해서 그가 직면하는 것은 '낯섦'이다.
여행은 자신을 낯설게 하는 행위이다. 초보자들에게 '낯섦'은 두려움이지만 이력이 붙은 이들에겐 '끌림'이다. 그 '끌림' 때문에 자신을 수없이 낯선 고장에 세워 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 '끌림'의 주체는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가 바로 파리다"처럼 변모까지 한다. 그래서 갔던 곳을 또 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하는 여행에 '발동 걸렸다'라는 표현을 쓰고 가방을 꾸린다. 그래서 내게 여행은 일상은 아니고 아주 특별한 외출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다. 그러나 이병률의 명함에는 일상과 여행이 뒤바뀌어 있다. 여행가들에게 여행은 일상인가. 그래도 여전히 여행인가.
이병률의 '끌림'은 '정(情)의 끌림'인 것 같다. 그러면서 이병률의 글은 쿨해 보인다. 그걸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우리 시골 사람 같은 풍속과 어울림과 정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러다 그가 손해본 일은 부지기수다. 돈을 떼이고 가방을 도둑맞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고. 그러면서도 그는 "앞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된다"라고 말한다.
사진은 상당히 편리한 '이미지의 보관함'이다. 사실을 확인하는 보도 사진의 경우에는 '사실의 보관함'이겠지만, 이병률에게는 '이미지의 보관함'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럴 경우 사진은 게재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은 힘이 크고 외연이 넓다. 이병률의 사진은 많은 경우, 비껴나 있는, 뭉개진 그림자 같은 이미지의 사진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것을 포괄하기에 글쓴이에게 용이하다. 여행이 끝나고 바라보는 인화된 사진 속에서 새로운 말들이,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사진과 글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집이 돼주는, 그러나 서로가 없이도 건재하는 대상이다. 그 쏟아진 이미지 때문에 글의 형식은 편지가 되기도 하고, 일기가 되기도 하고, 참회록이 되기도 한다. 이 책 <끌림>처럼.
그의 스타일에 각 글들의 소제목은 굉장히 친절한 행동인 것 같다. 제목 짓기도 즐거운 작업이므로. 아니 직접 만나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믿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오래 떠다닐 수 없을 것이다.
이병률이 정착할 때가 올까. 정착하게 되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될까. 그건 모를 일이다. 얼마나 주변이, 이웃이 그를 끌어당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정'이라는 자석에 무척 약한, 가냘픈 쇠붙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