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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Jul 31. 2024

사소하지만 대수로운

목성과 화성이었다. 올해 장마가 끝났음을 내게 알려준 표지는.     

 

지난 29일 새벽 4시 반. 물류센터 일요일 야간 근무를 끝내고 건물 옥상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다. 동쪽 하늘엔 하현을 막 지난달이 어두운 하늘에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시로 구름이 삼키곤 했지만, 자주 볼 수 없었던 존재를 올려다볼 수 있어 반가웠다.      


그런데 달 왼쪽 아래로 밝은 광채를 내는 존재들이 또 있었다. 밝기만큼 덩치도 큰 목성과 불그스름한 화성이었다. 장마 동안 태양계 밖으로 여행을 떠난 듯 한참을 볼 수 없었던 행성들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기 전까지 나는 한참이나 새벽 동쪽하늘의 신비를 감상했다.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장마 기간 소소하나마 자연 사물들이 각기 다른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화랑대역으로 이어지는 경춘선 숲길엔 널따란 능소화 담벼락이 있다. 정체전선이 잠시 남하하던 7월의 어느 날 나는 이 능소화를 보기 위해 그늘 길을 마다하고 햇볕 따가운 ‘능소화 벽화’ 쪽 길로 걸어갔다.      


걷다가 멈춘 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한 가지 끝에서 능소화가 열 송이 가량이나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그러나 각자 개성 있게 붙어 있는 모습이, 마치 제비집 속 새끼들이 먹이 물고 온 어미 제비를 향해 한껏 입을 벌리는 모습 같았다. 한두 송이 우아하게 피어 있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잔뜩 모여 피어 있으니 탐스러웠다.      


산책로를 걸을 때마다 유심히 보는 풍경이 있다.      


미루나무인 듯싶은데 키가 매우 크고 날씬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상층 부분이 한들한들 흔들거렸다.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가 가늘어지고 힘이 약해지는 곳.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며 즐기는 듯했다.      


그런데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그 높은 곳에서 매미 소리가 내려왔다. 나무가 흔들거릴 때마다 매미 떼창 소리도 흔들거렸다. 사람의 목과 얼굴 부분에 해당하는 나무 상층부와 매미 소리가 시각과 청각으로 이렇게 내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한밤중 풀잎 위에 맺힌 물방울. 비가 내린 후 생긴 것이니 이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숨 막히는 건물 안에서 일하다 도망치듯 나오니 그 흔하디 흔한 것도 내 시야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 깨알 같은 물방울 중에 붉고 푸른 색을 내는 것이 있었다. 근처 가로등의 빛을 반사한 것이다. 쭈그리고 앉아 보았다.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 조그만 것이 프리즘 역할을 하다니.     


근처 습지에서 개구리가 껄껄대는 성인 웃음소리처럼 울어댔다. 비를 뿌린 후 몽롱하게 잠자듯 떠 있는 구름 사이로 항공기 한 대가 등을 밝힌 채 날아가고 있었다. 근처 숲은 비를 머금고서 싱그러운 내음을 대기에 가득 채우고 있고.       


신록은 한여름에도 만들어진다. 장대비를 맞고 새로 난 잎들이다. 먼저 나 짙푸르러진 잎들이 연녹색의 신생아를 안고 있는 듯하다. 신록을 발견하면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선다. 미소가 절로 난다. 그 풍경을 보며 내 마음도 젊어짐을 느낀다.      


모두 사소하지만 대수로운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나의 사소한 하루를 대수로운 하루로 만들어 준다. 오늘은 무엇이 나를 잡아당겨 구김살 생긴 내 마음을 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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