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만이지? 너무 오랜만의 전화라 다소 놀라기도 했지만 나도 요즈음 J가 궁금했다. 근무시간 중 집중해서 일하던 차여서 잠시 미뤄두었다가 그날 오후에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보았다.
“J야, 잘 지내지? 너무 오랜만이다.”
“00아, 나 잘 못지내. A가 이혼하재. 소장이 날라왔어.”
J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였다. 울음이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에게는 중학교 시절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여섯명의 찐 친구들이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소개팅에서 남편을 만났다. 1995년 6월 22일, 대학로 혜화역의 분주했던 그 날의 분위기와 KFC 앞에서 A와 함께 서있던 남편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1학년 말부터 나는 남편과 사귀게 되었고, 풍물패를 하던 나의 동아리 일일호프에 남편은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와주었고, 그 후로 나는 자연히 그의 친구들과도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 부부와 3주 간격으로 결혼한 A커플은 신혼초부터 자주 툭탁거리기는 했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부부가 겪게되는 의례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 우리 가족과 일본 오키나와 여행도 함께 가는 등 별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지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2년 전인가 J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다행히 초기라 수술 후 항암치료를 잘 받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간혹 남편 친구들이 내가 사는 동네로 놀러올 때면 A를 보기는 했지만 잘 지낸다고만 했을 뿐 별 다른 얘기는 없었는데.
J는 아직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여느 부부들처럼 다투기는 했지만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이 이혼하자고 소송을 걸고, 이혼의 사유는 J 때문이고 J가 유책 배우자라는 내용이 빼곡히 적힌 소장에 절망하며 울부짖었다. 나는 갑작스런 소식에 너무 당황스러워 마음을 강하게 먹고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마흔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내 나이. 주변에서 간혹 이혼소식을 듣게 된다. 이십년 가까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부부사이에 남는 게 뭐가 있으리. 30대 때는 피터지게 싸우다가도 마흔 중반이 넘어가면 그럴 기운도, 열정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서로 고군분투하며 애쓰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 그 연민으로 서로의 흰머리를 뽑아줘 가며 나머지 여생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젊은 시절의 애증이 연민으로 변화하지 못하는 사이는 노년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 한끝의 차이를 나는 느끼고 또 이해한다.
마음이라는 것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단단해지고, 넓어지고, 유연해져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실상 나이를 먹어가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체력이 약해지듯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으며, 어린아이처럼 서운해지기도 하고,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을 불러오기도 한다. 마음에도 단련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또 생각의 전환도 해야 한다. 내가 먹는 마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의심도 간혹 품어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 보아야 한다. 지금 내 마음은 안녕한가? 오늘은 평안한가? 하지만 알면서도 잘 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어려운 것을 보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완성에 이르지는 않을 듯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우리는 마음의 표현에 인색해진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과 집만 왔다갔다 하며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사적인 만남은 점차 드물어지고, 공적인 인간관계만이 늘어간다. 공적인 관계에서는 되도록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진다.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아마추어나 하는 창피한 일로 생각된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그렇게 여겨왔다.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3년간의 코로나-19와 함께 사적 만남은 더욱 빈도가 낮아지고 우리는 본인의 마음쯤은 스스로 다스려야 했다. 이제 코로나가 점차 회복되고, 일상의 감기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3년 동안의 변화가 적응이 되어버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사회적 분위기는 쉽게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얼마 전 본청의 예산담당 직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업무의 스트레스와 주변의 압박감 등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10여년 전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후임자였다. 그 분은 나보다 한 살 위의 남자였고, 미혼이었다. 한때 수원에서 제일 힘든 1,2위의 학교에 나란히 행정실장으로 발령받기도 했었다. 그 학교에서 그는 3개월만에 청으로 전입했고, 내가 기록원에 근무하던 시절에도 오며가며 마주치면 인사정도는 하는 그런 사이였다. 왜소했던 체구와 약간은 숱이 없는 머리를 한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걷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많이 안좋았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정을 했을까. 그에게 앞으로의 남은 생은 의미가 없었던 게지 싶었다.
공직에 있으면서 몇 번의 죽음을 봐왔다. 가깝게 지내던 근처 학교의 선배가 어느날 출근준비하던 중 눈이 보이지 않아 쓰러졌고, 병원에 갔더니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2년정도의 투병생활 끝에 하늘나라로 간 것이 5년 전쯤의 일이다. 신규 때 업무적으로 알던 어떤 분이 퇴근길 집앞 횡단보도에서 차사고로 사망하셨다는 부고를 받은 적도 있다. 그분은 퇴직을 겨우 몇 년 앞두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아주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죽음은 아주 먼 이야기나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하나의 문을 열면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아주 가까이에 침투해 있다가 갑자기 확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친구다.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 서울 한복판에서 길 가다가도 158명이 한꺼번에 죽기도 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 조심하야 하며,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일에 게을리하면 안된다.
이태원 참사 이후 나는 2022년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 몸서리쳐졌고, 현재까지도 그 우울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삼키겠다. 그들은 언제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찾아올지 모른다. 나같은 소시민도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라니. 하지만 나는 사필귀정을 믿는다.
몇 년전 내가 아주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불면증이 왔고 늘 불안했다. 눈물로 며칠을 지새웠다. 닥친 일이 다 해결될 때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나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동그라미 같아. 나는 지금 그 동그라미의 맨 밑에 있는 것 같아. 여기서 더 꺼질 바닥은 없을거야.”
“그래? 그럼 이제 위로 올라갈 일만 남았네.”
내 얘기를 들은 남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었다.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때 깨달았다. 그 말이 마치 구원의 십자가라도 되는 듯 부여잡고 나는 1년을 버텼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말을 해주고 싶다. 인생은 동그라미라고. 이제 위로 올라갈 거라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마음을 다독이며 함께 버텨보자고.
고백하자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출근하여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백팔번뇌에 시달린다. 두시간 정도 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마음속에서 쓰나미같은 폭풍이 인다.
“지난주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느라고 죽을 뻔 했어. 너무 힘들었어.”
올해 초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이 끝나고 전면 등교가 시작됐을 때 오랜만에 일주일을 등교한 딸의 이야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나의 이야기 같이 반가웠는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20년을 직장생활을 해도 20년째 아침이 힘들어. 매일아침 일어날 때마다 이불속에서 전쟁을 해. 일어날까? 말까? 어른이 되면 안그럴 거 같지? 엄만 아직도 매일이 그래.”
그렇다. 아직도 나는 아침이 싫고, 월요일은 더욱 싫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을 다닐 땐 한 십년쯤 지나면 괜찮아지려나 했다. 그땐 입사한지 10년 된 선배가 아주 대단해 보였다. ‘와 어떻게 한 직장에서 10년을 버틸 수가 있었을까? 대단하다. 저 선배는 월요병도 없고, 회사 다니는 것도 힘들지 않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십년이 지나서도 나는 아침이 힘들었고, 이십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월요일이 싫다. 그런 거 보면 60살로 정년퇴직 할 때까지 아마 나는 월요일이 싫고, 매일 아침마다 5분을 더 이불속에 있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바삐 출근을 하고, 불편했던 마음을 다독이고 나면 내가 출근해서 앉아있는 이 자리가 참으로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진정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마음이란 참으로 괴상하다. 같은 상황에서도 180도 달라지기도 하니 말이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행복과 불행 사이엔 ‘다행’이 있다.” 너무 멋진 말 아닌가. 소리내어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