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
‘안다’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 소소인문 온라인 글쓰기 <하루 10분, 영화에서 건져 올린 질문으로 글쓰기>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느덧 깨닫게 되는 게 있다. 내가 '안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착각이었음을.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데었다고 하는 순간들을 돌아보면 상대방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본 후, 상대의 본모습과의 괴리를 느꼈을 뿐인지 모른다.
호감이 느껴지면 확대하고 과장해서 더 그 사람이 좋아지는 경험이 있다면, 그때의 그 감정이 바로, 보고 싶은 대로 본 결과이지 않을까? 나는 그런 순간들이 많았다. 좋은 사람을 더 좋아하면 나의 기쁨이 커지기에. 의도하고 작정하고 더 좋게 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의식 속에서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 확대, 과장을 종종 했던 것 같다.
싫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한 사람의 안에 나쁜 것만 가득하지 않을 텐데, 누군가의 어떤 면이 싫어지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들을 나쁘게 해석하려 한 경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내가 싫어해도 마땅한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한 사람 안에는 여러 면이 존재한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많은 반사면이 있다. 좋은 면, 나쁜 면이라는 말도 참 주관적이다. 앞에 '나에게'라는 말을 붙여보자. 누군가에게는 좋은 면이 나에게는 나쁜 면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좀 괴로워진다. 싫어하는 감정은 그 자체로 기분이 썩 좋지 않고,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면 내 마음이 편할 텐데 그 사람 안에 좋은 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미워만 할 수 없어지는 까닭이다.
20대의 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곤 했다. 그래야 생각이 깔끔해졌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아도 속으로는 이미 선을 그어 이쪽저쪽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살면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구분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졌고 그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에너지가 많이 쓰였다.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을 때 배터리가 빨리 닳아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구분이 안 되는 것을 자꾸 구분하려 하니 피곤했다.
지금은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다. 이런 면 저런 면 또 다른 면을 가진 한 사람을 그냥 그렇게 바라본다. 달라진 점이라면 사람을 이쪽저쪽으로 구분하지 않고 이제는 거리를 조절한다는 것. 내 에너지의 양을 알고 나의 결을 알게 되어 가능해진 좋은 점이다. 내 안에도 수도 없이 많은 좋은 면과 나쁜 면, 애매한 면들이 있고 그것을 안고 살고 있으니 타인의 안에도 그렇겠지. 내 눈에 좋은 면이 진짜 좋은 게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내 눈에 나쁜 면이 진짜 나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하다.
데카르트가 늘 의심하라고 했던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쪼개어 의심해 보면 대체로 더 나은 방향으로 생각이 전환되고 확장된다. 그리고 나는 절대자가 아니다. 내 감각, 판단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 이렇게 생각하면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에서도 조금 편해진다. 그 사람이 그런 것뿐, 그 생각과 판단이 곧 나인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도 틀릴 수 있으니까. 요즘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그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표현하는 게 최선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압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이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바, 겹겹이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당신의 발자취를 압니다. 내가 당신의 삶의 궤적을 압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내가 당신을 압니다.
내가 당신의 발자취를 압니다.
내가 당신의 삶의 궤적을 압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내가 당신을 압니다.
내가 당신의 발자취를 압니다.
내가 당신의 삶의 궤적을 압니다.
이제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발자취와 삶의 궤적을 본 바, 그의 선택의 순간들을 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하겠지. 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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