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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원 Oct 24. 2020

영화 <미라클 벨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갯짓

영화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14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갯짓


미라클 벨리에

감독 : 에릭 라티고

출연 : 루안 에머라(폴라 벨리에), 카린 비아르(지지 벨리에), 프랑수아 다미앙(로돌프 벨리에)

개봉 : 2015. 08. 27


나는 두 개의 언어로 말한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문화가 살고 있다.
말소리와 대화 소리, 음악 소리가 있는 ‘소리’의 낮.
수화와 소리 없는 대화, 시선만이 오가는 ‘침묵’의 밤.

두 세계로의 항해.
말과 수화.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문화.
그리고 두 개의 나라.

*출처 : <수화, 소리, 사랑해> 한울림

<수화, 소리, 사랑해!>는 들리지 않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 침묵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에 한 발씩 담그고 두 세계를 오가며 소통하는 모든 코다들의 성장담이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서 외국어와도 같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기까지 겪어야 했을 코다들의 남모를 상처와 수많은 흔들림을 꾹꾹 눌러쓴 코다들의 일기장이다.


 베로니크 풀랭의 자전적 스토리 <수화, 소리, 사랑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쓴 영화 <미라클 벨리에>의 주인공 폴라는 CODA(Children of Deaf Adult)이다. CODA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뜻하는 말이다. 축산농장을 운영하는 벨리에 가족 중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는 폴라는 주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담당한다. 건초를 주문하고 시장에서 치즈를 판매할 때는 설명을 한다. 학기 초 폴라는 파리에서 전학 온 학생, 가브리엘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를 따라 생각에도 없던 합창부에 가입한다.


 폴라는 음악을 좋아해서 매일 통학길에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노래한 적은 없다. 당연히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경험도 없다. 합창부 담당인 토마송 선생님은 폴라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파리에 있는 합창 학교 오디션을 제안한다. 학교 공연에서는 가브리엘과 듀엣으로 무대에 서도록 기획한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은 무대에서 폴라가 부르는 곡들을 들을 수 없다. 주위의 사람들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눈물을 훔쳐도 폴라의 엄마와 아빠는 진공 세상에서 머물 뿐이다.


 가족과 세상을 잇는 역할로 바쁜 폴라는 고민한다. 자신이 파리로 떠나고 나면 가족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이 비어버려 가족들이 혼란에 빠질까 봐 걱정한다.

내 부모님을 사랑했어요.
그들이 자랑스러웠고, 보호해 주고 싶었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창피하기도 했어요.
내 마음은 항상 둘로 나뉘어 있었죠.

두 개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는 건 큰 행운이었어요.
비록 가끔은 숨 막히고, 어렵고, 화도 났지만요.

*출처 : 베로니크 풀랭의 인터뷰 중


 영화 <미라클 벨리에>에 <수화, 소리, 사랑해!>의 저자 베로니크 풀랭이 카메오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시장에서 벨리에 가족이 치즈를 팔고 있을 때 치즈를 구입하는 고객으로 나온다. 폴라 엄마를 보며 폴라에게 “이 분은 왜 이러시니?”라며 말없이 웃고만 있는 폴라 엄마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이 꽤 무례한 손님에게 폴라는 당황하지도 않고 재치 있게 대답한다.


분업하는 거예요.
엄마는 미소, 난 설명.
가족이니까요!

폴라 <미라클 벨리에>


 영화의 원 제목이 왜 ‘La Famille Belier , The Belier Family 벨리에 가족‘인지 드러나는 장면이다.


 현 시장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폴라의 아빠는 농장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시장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한다. 언제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될 때까지 노력하고 포기를 모르는 폴라의 아빠다. 하지만 폴라는 아빠를 믿지만 세상의 시선이 걱정된다.


왜?
내가 청각 장애라서?
장애가 아니라 내 정체성이지!

오바마는 흑인이잖아?
흑인이면 대통령이 되는 데 장애가 아닌가?

우리 가족이 뭉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폴라 아빠 <미라클 벨리에>


 폴라의 아빠는 자신에게 청각 장애가 있는 것은 단어로 표현하면 청각 '장애’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는 장애가 아니라 정체성,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 CODA인 베로니크 풀랭(영화의 바탕이 된 자전적 스토리 <수화, 소리, 사랑해>의 저자)은 불러도 듣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소리를 속삭여줄 수 없는 부모를 멀리서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농인을 위한 연극협회에서 일하며 농인들을 대상으로 공연하게 된다. 그제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이자 하나의 문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대를 울려서 말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농인이 '장애인'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청인이 '장애인'이다.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아닌 것은 이미 장애라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선다.


 장애를 검색해보면 사전적 의미가 세 가지 나온다.

1. 어떤 일의 성립, 진행에 거치적거려 방해하거나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함
2.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3. 유선 통신이나 무선 통신에서 신호의 전송을 방해하는 잡음이나 혼신 따위의 물리적 현상

다음 어학사전

 우리가 흔히 ‘장애’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2번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애를 1번 정의로 생각한다면 장애의 의미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장애,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일 수 있다. 하나의 정체성이자 하나의 문화라고 인정하면 신체 기관의 의학적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닐 수 있다. 나아가는 길을 막지 못하는 것은 이미 장애가 아니니까. 에이미 멀린스의 사례로 우리는 이미 '장애'의 재정의를 경험했다.


* 에이미 멀린스

"진짜 장애는 억눌린 마음입니다. 그렇게 희망도 없이 눌려있는 마음 말이죠."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 유권자들에게 폴라의 아빠가 “여러분들이 장애자예요! 우린 세상에 열려있어야 해요. 열린 마음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이건 이래서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이 이미 장애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장애자라는 폴라 아빠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자신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시선도 그럴 수 있다는 것. 반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단정 짓는 사람의 시선이 타인에게 어떨지도 알 수 있다.

 폴라의 부모님은 시청에 출마 신청을 한 후 이미 당선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시장과 시장 부인으로서의 소양을 쌓고 있다. 폴라 아빠는 프랑스 제24대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의 자서전을 폴라 엄마는 재클린 케네디의 자서전을 읽는다. 영화 <미라클 벨리에>가 끝나면 쿠키영상에 폴라의 아빠와 엄마가 나온다. 시장에 당선되어 시정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폴라의 가족들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위 장면은 영화의 도입부다. 매일 아침 통학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폴라의 표정이다. 폴라에게는 하루 중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오렌지 색의 헤드셋이 마치 폴라를 충전하는 충전기처럼 보인다.


 폴라에게 음악은 무엇일까?


 폴라에게 음악은, 듣지 못하는 부모님과 동생을 사랑하는 폴라가 가족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장치 인지도 모르겠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즐거움이다. 폴라가 자신에게 허락하는, 눈이 아닌 귀로 들을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소극적인 쾌락, 음악을 듣는 것.


 그랬던 폴라가 첫눈에 반한 가브리엘을 따라 생각지도 않았던 합창부에 들어가면서부터 폴라의 인생에 대반전이 시작된다. 폴라의 가족에게 변화의 파도가 몰려온다.

 지방의 한직으로 퇴출되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이자 음악교사인 토마송 선생님이 폴라에게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다. 합창부 신입생인 폴라에게 하는 말인지 폴라의 인생 전반을 향해하는 말인지 아니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하는 말인지 헷갈리는 대사를 계속 날린다. 그것도 꽤 묵직한.


그건 네 목소리가 아니야.

아니, 네 목소리가 아니야.
따라 해 봐.
이제 네 목소리를 낼 때가 됐어!

네 목엔 보석이 숨겨져 있어.
화난 보석이지.

토마송 선생님 <미라클 벨리에>


 토마송 선생님의 발성 지도를 통해 처음으로 고음을 입 밖으로 내어본 폴라가 당황하며 밖으로 달려 나간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폴라의 표정이 오묘하다. 붉게 상기된 볼,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 하지만 흥분된 마음이 온전히 감춰지지는 않는다.

 듣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목소리의 주인이 성대를 울리지 않으면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폐 안의 공기가 성대를 비벼서 밖으로 나온 폴라의 목소리는 의지의 표현이자 누르고 있던 진심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가족의 역할을 담당하며 살아온 폴라에게 목소리는 자신의 인생이자 꿈 그 자체이다. 가족이 경영하는 농장 밖으로 자신만 분리되어 꿈을 펼치러 나가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농인 부모와 청인 자녀의 꿈과 갈등, 그리고 성장에 대해 말한다. '청각 장애'가 핵심 키워드 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에서 '청각 장애'를 걷어 내어도 여느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CODA가 아니어도 부모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녀가 있다. '나'이기 이전에 '역할'이 더 커서 '나'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모가 생각하는 거리와 자녀가 생각하는 관계의 거리를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가족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래서 영화 <미라클 벨리에>는 우리에게 수많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내 목소리는 무엇인지' 이제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주로 토마송 선생님의 대사를 통해서.


 지금 나이가 십 대이든 이십 대이든 사오십대이든, 현재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니까. 중요한 것은 내 입을 통해 나의 진짜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의 여부다. 매우 슬프게도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한 번도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떠나 파리로 오디션을 보러 가는 것을 주저하는 폴라에게 친구인 마틸드가 말한다.


너의 부모님은 청각 장애가 있는 거지, 강아지가 아니잖아.
너 없을 때는 어떻게 사셨는데?

마틸드 <미라클 벨리에>


이제 막 초경을 한 십 대 초반의 폴라가 감당하고 있는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폴라는 스스로를 부모님의 돌봄을 받는 어린 자녀가 아닌, 부모님을 모시는, 돌보는 역할로 생각하고 있다. 부모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폴라 스스로가 느끼는 무게다.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인생이니 자신이 결정하겠다며 오디션을 보지 않겠다는 폴라에게 토마송 선생님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다시 한번 건넨다.


네 인생인 거 확실해?
나도 그 구덩이를 잘 알아.
나도 같은 묘지에 있으니까.

토마송 선생님 <미라클 벨리에>


 토마송 선생님의 에피소드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이 대사를 통해 토마송 선생님이 젊은 날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라에게서 자신을 보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보석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폴라를 보며 너무나 안타깝지만 토마송 선생님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다. 폴라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리고 '듣는 ' 듣는 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릴 ' 있지만 노래는 '노래될 ' 없다. 수동태가 불가능하다. 본인의 의지 없이는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강당에서 노래하는 폴라의 모습을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빠. 벨리에 가족을 제외한 모두는 미셸 사르두의 <당신을 사랑하리 Je Vais T'aimer>를 부르는 폴라와 가브리엘의 목소리에 빠져든다. 눈물을 훔치고 격앙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집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폴라가 학교 공연을 하고 온 날 저녁, 폴라 아빠가 폴라에게 요청한다. 무대에서 불렀던 그 곡을 다시 한번 불러달라고. 폴라의 목에 손을 대고 아빠는 성대의 진동을 통해 손바닥으로 폴라의 노래를 듣는다. 폴라의 마음, 진심까지도 전달받은 것일까? 다음날 새벽 일찍 폴라의 부모님은 폴라를 깨워 파리 오디션장으로 달려간다.

 미셸 사르두의 <비상 Je Vole>을 부르는 폴라. 폴라의 마음인 듯한 가사를 진심을 담아 수어로 동시에 노래하는 폴라를 보며 부모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제 품 안의 자식이 아니구나. 떠나보내야 하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날아오르는 거라는 노래의 가사가 영상을 뚫고 나와 마음을 두드린다. 당신은 날아오를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다.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납니다.
두 분을 사랑하지만 저는 떠납니다.

오늘 밤이면 부모님 곁에 더 이상 두 분의 아기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아오르는 거예요.

부디 저를 이해해 주세요, 저는 날아올라요.
담배 연기 없이 술기운도 없이 저는 날아올라요, 날아가요.

<미라클 벨리에>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보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생각한다. 폴라는 안전하고 편안한 세계에 있다. 가족과의 갈등이 없는 이 편안한 상태가 좋으면서도 뭔가 공허하고 허전하기도 하다. 가슴 뛰고 벅차오르는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데미안>


 폴라보다 힘도 훨씬 세고 폴라의 친구인 마틸드에게 성적 호감을 드러내며 성관계까지 시도하는 폴라의 동생 쿠엔틴 조차 엄마에게는 아기다. 엄마는 폴라와 쿠엔틴을 성장하는 자식이 아닌 품 안에서 귀여웠던,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아기로 고정하고 있다. 어쩌면 오디션을 보러 파리로 간다는 등의 폴라가 하는 말들이 엄마에게는 가슴에 붙여놓은 일체형의 자식을 몸에서 강제로 뜯어내는 듯한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폴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폴라는 알에서 나왔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세계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폴라의 부모님도 함께 나왔다. 폴라가 더 이상 품 안에 안겨있던 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순간이 바로 '미라클 벨리에'다!


 부모님을 떠나 비상하는, 날아오르는 폴라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목소리를 처음 내고 화장실에서 웃는 것조차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폴라가 이제야 활짝 마음 놓고 웃으며 하늘로 뛰어오른다.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 날아오르는 폴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갯짓을 시작한
폴라와 가족, 그리고 나와 그대를 응원합니다.
 



영화 <미라클 벨리에>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 나에게 소극적인 즐거움과 적극적인 즐거움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장애'는 어떤 의미인가?

*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진짜 내 목소리'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 가족이 상처가 될 때는 언제인가?

* 가족의 존재가 힘이 될 때는 언제인가?

* 나에게 성장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는 어떤 의미인가?

* 두 세계를 오갈 때 내면에서 무엇이 충돌하나?

* 나에게 '완전한 독립'은 어떤 의미인가?

* '누군가의 자식'에서 '온전한 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 나를 위로하는 음악은 무엇인가?

* 나는 우리 가족의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나?

* 나에게 비상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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