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12
| 인간은 나선이다
출연 : 하시모토 아이(이치코), 마츠오카 마유(키코), 미우라 타카히로(유우타)
개봉 : 2015. 02. 12
<리틀 포레스트>는 '본격 퇴사 권장 영화' 혹은 '귀농 장려 영화'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평화로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집 앞마당에서 갓 캐어온 당근으로 스튜를 만들고 눈 덮인 밭에서 머위를 따서 머위 된장을 만들어 먹는다. 노지 재배한 토마토는 여름 내 햇빛을 받아 싱그럽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더운 여름에 찬 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낸 시원한 토마토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달콤한 수분이 퍼진다. 동네 어른들께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며 관계가 촘촘해진다. 마실을 다니며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게 만든 밤 조림을 서로 권한다. 삶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온기가 느껴진다. 직접 심고 일구고 거두어 살아가는 건강한 삶이 담백하다. 편리한 도시 생활에서 느끼는 회색빛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 겨울과 봄>의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로 나가 살다가 도망치듯 고향 코모리로 돌아온다. 코모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마을이다. 시내로 나가려면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겨울에는 반나절 이상이 걸린다. 작은 숲 같은 농촌마을 코모리에서는 모두가 자급자족한다. 작물들과 채소를 직접 농사짓는다. 제철 재료로 식사를 준비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작물과 채소를 절이고 말린다. 매 끼 식사를 먹으려면 재료부터 모든 것을 손수 준비해야 한다. 노동에 대한 시간과 노력을 자연은 농작물로 보답한다.
코모리로 돌아온 주인공 이치코는 요리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성장한다. 자신과 타인(자신 외의 모든 사람, 특히 엄마 후쿠코)의 관계를 바라보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의 자신을 현재의 시선으로 반성하기도 한다. 이치코의 엄마는 시골 마을 코모리에서 몇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고 이치코가 성인이 되기 직전 겨울에 코모리를 홀로 떠난다. 이치코가 학교 가기 전에 부탁한 머위 된장을 만들어 두고. 이치코는 엄마가 왜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코모리로 쫓기듯 돌아와서 일 년을 혼자서 생활하며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이치코의 엄마 후쿠코는 누구의 엄마, 아내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뿐 아니라 이치코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딸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의 이치코를 생각한다. 자신의 감자 빵 레시피를 원하는 이치코에게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 것도, 자신이 읽을 책은 스스로 찾으라고 말하는 것도 후쿠코가 이치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서 괴로웠던 후쿠코는 결국 인간은 나선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다. 원이 아니라 나선이라면 위로든 아래로든 아니면 옆으로든 커지게 될 테니 같은 자리는 아닐 거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영화에서 여름부터 시작하는 계절의 흐름은 마치 이치코가 젊은 혈기로 무작정 코모리를 떠나던 때와 연결된다. 이치코가 코모리로 다시 돌아온 것도 여름이다. 무덥지만 초록이 가득하고 생명이 움트는 시기, 그리고 덕분에 잡초도 많이 자란다. 나의 여름이 겹쳐진다. 무모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던 그 시기에 내 인생에도 잡초가 많이 자랐다. 잡초를 뽑으려면 우선 잡초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하나 제거해야 한다. 잡초 옆에 있는 모종은 두고. 잡초라는 것도 사실은 인간에게 이용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뿐 생명력 넘치는 초록 식물이다. 잡초를 다스리고 나서 내 인생 밭은 더 강하고 풍요로워졌다. 이치코의 여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치코가 코모리 마을로 돌아온 여름은 공기 중의 습도가 너무 높아서 허공에서 수영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다. 이치코는 습기를 제거할 겸 빵을 굽기로 한다. 그러고 나서 수유 열매로 잼을 만들기 위해 뒷산으로 간다. 수유나무 아래에 떨어진 열매들을 보며 이치코가 씁쓸해하며 말한다.
“많은 열매가 떨어져서 썩어간다.
떨어진 건 모두 쓸모가 없을까?
그런 건, 외롭다.”
_이치코 <리틀 포레스트>
이치코는 그동안의 모든 과정이 쓸모없다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는 마음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유나무 열매와 자신이 비슷한 처지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도망치듯 코모리로 돌아온 자신이 마치 땅에 떨어진 수유나무 열매 같다. 이치코가 설탕을 더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잼은 다 졸여졌고 만들어진 잼의 색은 탁한 자주색이다.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치코 자신의 마음 같다. 이치코는 알고 있다.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모든 과정도 사실은 쓸모없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두렵고 무섭다. 이치코의 엄마 후쿠코처럼.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도는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인간은 어쩌면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지만
나선은 조금씩 커지게 될 거야.”
_이치코의 엄마 후쿠코 <리틀 포레스트>
왜 코모리를 혼자서 갑자기 떠났는지에 대한 것도, 스무 살이 되면 가르쳐 주겠다던 감자 빵의 레시피도 없이 인간은 나선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독백이 적힌 엄마의 편지다. 이치코는 도시에서 겪은 일들 그리고 도망치듯 돌아온 코모리에서의 생활을 통해 엄마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엄마의 감자 빵 레시피를 맞추려고 이리저리 시도하고 실패하다가 결국 이치코는 자신만의 감자 빵 레시피를 완성했다. 인간이 나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읽으며 내 눈가가 촉촉해진다.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려 주는 기분이다. 이치코의 엄마로서가 아닌 후쿠코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하며 고독의 시간을 보냈을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그래도 미성년자인 딸만 남겨두고 아무 말도 없이 훌쩍 집을 나가서 연락두절인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해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는 배우지 못한 것들을, 이치코는 코모리에서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자신을 위한 매 끼니의 공들인 식사를 통해,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벼를 통해, 눈 덮인 땅 속의 머위를 통해, 추위를 조미료 삼아 익어가는 무말랭이를 통해. 그리고 엄마와 함께 살면서 익숙해서 지나쳤던 엄마의 정성을 이치코는 이제 알게 된다. 엄마의 푸성귀 볶음은 겉껍질을 매번 벗겨서 만든 정성 어린 음식이었다는 것을. 덜렁대고 대충 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해의 공간이 생긴다. '실패'라고 이름 붙였던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성장하는 나이테 사이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망치듯 도피처로 삼아 찾아온 코모리에서 이치코는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의 문턱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땅에 떨어진 수유나무 열매는 열매로서의 제 할 일을 못한 것일까? 수유나무 열매가 수유나무 열매 다우려면 어떠해야 하는 걸까? 열매가 땅에 떨어져서 썩어가면 수유나무의 마음은 어떨까? 땅에 떨어져도 수유나무 열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마치 땅에 떨어진 수유나무 열매를 응원하는 심정이다. 땅에 떨어진 붉은 조각들을 보는 내 마음도 그렇지만, 수유나무가 떨어진 열매를 보며 가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은 더 큰 듯하다. 이 마음을 따라가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열매가 있을 것 같다. '나만 생각하던 나'에게서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나'로 작은 계단 하나를 오른 것 같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진행은 평화롭고 잔잔하다. 대화도 거의 없이 매 계절마다 음식 일곱 가지가 진행될 뿐이다. 하지만 이치코의 내면은 분주하다. 인생을 제대로 대하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날을 갈고 있다. 영화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모두가 하나의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각자의 거울은 다른 것을 비춘다. 같은 영화 속에서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거울을 본다. 오늘의 거울은 오늘의 나를 비춘다. 나의 오늘은 조용히 발자국을 남기며 나아가고 있다.
나는 바란다.
이제 이치코가 만드는 수유나무 열매 잼의 색이 쨍하기를.
이치코가 바라보는 하늘이 선명한 파랑이기를.
그리고 내가 그리는 나선이 어제보다 위로든 옆으로든 조금은 커져있기를.
당신도 그러하기를.
영화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 겨울과 봄>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 나에게 요리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제철음식, 제철 재료는 어떤 의미인가?
* 주인공과 엄마 사이에서 요리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리틀 포레스트'는 어디인가?
* 나는 어떤 사람을 존경하나?
* 내 상태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음식은 무엇인가?
* 내가 토마토 라면 나에게 습기는 무엇인가?
* 나에게 '이치코의 하우스'는 무엇인가?
*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 부모님의 사랑 표현은 무엇인가?
* 부모님을 나와 같은 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언제인가?
* 내 삶에서 소중한 조미료가 된 추위는 무엇인가?
* 내 눈에 유독 거슬리는 타인의 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 조바심이 나지만 가장 좋은 때를 위해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 내가 그리는 나선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지금 내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