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어김없이 이별을 맞이한다. 방금 난 그 이별의 마침표를 찍었다. 올해도 나의 사랑은 반쪽짜리 짝사랑인 것만 같아서 마음 한쪽은 공허함만 가득하고, 발걸음은 무겁다. 짝사랑에도 장점이 있다. 시작도 끝도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달려온 탓인지, 긴장을 놓은 순간 온몸 구석구석에 통증이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듯 한 근육통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다시 비울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다시 또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는 완전히 비워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렇게 반 아이들과 1년의 짝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나는, 담임선생님이다.
“우와,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세요?”
“선생님, 몇 살이세요?”
“결혼은 하셨어요?”
“남자 친구는요?”
“어디 사세요?”
담임선생님을 향한 탐색전이 시작된다. 장난 끼 가득 찬 얼굴을 무기로 호시탐탐 농담의 기회를 노리는 녀석들이 한 두 녀석이 아니다. 허투루 보이지 않으려 애써 담담한 척 웃음기 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웃지 말자, 웃지 말자, 웃지 말자.’ 그렇게 다분히 의도가 실린 ‘웃음기 빼기’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이 전략은 유통기한이 매우 짧다. 이미 유치원 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를 지내면서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났던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을 딱 보는 순간, 동물적인 직감으로 선생님의 스타일을 분석해내는 전문가들이다. 엄청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라는 건 눈치챘을 것이다. 무서운 선생님이기보다는 ‘기회를 주는 선생님’이고 싶었다.
누구나 잘못은 하기 마련이고, 인간의 삶은 실수의 연속이다. 같은 잘못을 가지고 세 번 이상을 이야기한다는 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 선생님의 지도가 아닌 잔소리일 테니, 서로에게 비효율적이다. 모든 학생에게 3번의 기회를 주는 일명 ‘쓰리아웃’ 제도를 활용한다. ‘아웃’의 의미는 담임선생님이 온전히 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호자의 상담이나 진로진학부, 생활안전부와 같은 타 부서의 도움을 받아 해결방법을 찾아본다는 의미지 관계의 단절이 아니다. 교실 안팎에서 보내는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뒤늦게라도 알아주는 학생이 있다면 그걸로 다행이다.
첫 만남, 이후 사계절이 흘렀다. 혼신의 힘으로 달려 또 이렇게 겨울을 맞이한다. 이별을 준비하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아프고 시리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 나의 사랑은 N분의 1로 나뉘어 여전히 미완성이다. 이별의 마침표는 글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 마음은 여전히 짝사랑 중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