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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Feb 19. 2020

에둘러 표현하기, 미루어 짐작하기

힐러리 맨틀의 '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을 읽고

영국인의 특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점잖게 낯을 가리고 의사표현이 간접적이라던가, 남에게 자랑스레 호의를 보이면서도 거리 유지만큼은 철저히 한다는 식의. 지나치게 정형화된 시각이라 비판받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특유의 유머 역시 한 단면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든다. 덜 명백하고 덜 직선적인 방식으로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작가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소설은 늘 에둘러 설명했다. 작가는 사건의 즉각적 구체화를 위해 무리하지 않으며, 언제나 덜 노골적이었다. 예를 들어 부모의 다툼이 생략된 채, 난장판이 된 부엌의 딸을 보여주는 식이다 ('상해에 관한 법률'). 독자는 던져진 힌트 조각을 맞추며 작가의 의도를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사건 이후 어수선한 상황, 흩어진 단서를 마주한 독자는 조금 전 시점으로 자신을 떠밀어야만 한다. 이런 방식의 두 가지 효과라고 하면 앞서 말한 (영국식) 간접성을 반영하는 소설적 장치가 된다는 점, 읽는 이의 상상력이 자극받으면서 더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이 되겠다.


생략된 세부사항은 퀴즈 형태로 각 단편에 등장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눈치채려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읽어야만 한다. 직장 동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할리가'), 부부의 최근 고민거리는 무엇인지 ('겨울 휴가'), 아이들이 말하는 '콤마'란 누구를 말하는지 ('콤마'). 퍼즐과 같은 구조였다. 전모를 알아차린 지점에서 가벼운 성취감을 느낄 정도였다. 게다가 몇몇에선 현실과 환상이 혼재하게도 되는데, 그 간극을 어림짐작으로 채워가는 사이 독자는 씁쓸한 분위기에 젖게 된다.


작가의 시선에 줄곧 실려있던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그리고 이는 위선을 포함한 피상적 인간관계에 대해서였다. 인물은 전통(?)에 따라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다가 어느 순간 느끼는 경멸에 괴로워한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의사소통은 빈번하게 엇갈리고 진의가 전달되지 않는 한편 ('심장은 경고도 없이 멈춘다') 때로 상대방의 고통에 둔감한 채 스테레오 타입에 갇힌 해석만을 하게 된다 ('긴 QT'). (응당 고마워해야 할) 자신의 독자들에게 불쾌함 섞인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에 마음을 열어버리는 이중적 태도에 고뇌하기도 한다 ('당신을 어떻게 알아보죠?').


한 편씩 읽어나가며, 소위 '영국적 성격'의 자각이 동기가 된 작품들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흐름은 결국 사회를 향한 시선으로까지 확장되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꽤 직접적으로 시도된다. 런던 인파 속 파편화된 개인은 조금의 관련성도 없이 너무나 제각각 각자의 목적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종착역'). 이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던 나머지, 그들 중 누군가와 연(縁)을 감지하는 희귀한 이벤트가 판타지의 소재가 되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소설 속 차갑고 음울한 정서가 무겁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연장선상에서 '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 : 1983년 8월 6일'을 해석할 수 있다. 서로 간의 연결이 인식되는, 보기 드문 사례로 해서 말이다. 초점은 암살 대상이 아닌, 공통의 적에 대항하여 연대를 이룬 시민들에게 맞춰지고 있다. 이 점은 암살 직전 단편이 끝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낯선 사람, 게다가 자신의 신분을 속인 범죄자에게 그토록 손쉽게 동조해 버리는 일이, 작가가 노출했던 (표면적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예외적인 전개임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들 모두 사실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가까워지기를 갈구하는 존재들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설정을 극적이면서 현실감 있게 제시해 보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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