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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Jan 25. 2020

신동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읽고

성공한 사람의 회고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인-결과의 틀로 과거를 볼 때가 많아서다. 좋은 이야기만 하거나, 끼워 맞추기식이 될 위험도 있다. 사르트르 같은 지성이 자전의 이런 맹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 '말'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곳곳에 담긴 경이로운 디테일은 유년의 기억이 각별했음을 말한다. 어른들 관심 끌기에 몰두하던, 수줍은 소년을 대작가로 성장시킨 정신의 양분을 목격한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능케 한 구속 없는 사고, 알자스의 독, 불이 섞문화가 한 역할이 있을 것이다. 어린 사르트르는 과연 신동이었다. 영특한 소년의 샘솟는 문재(文才)가 대단하다.


책과 글이 창조하는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고, 그 안에서 대문호들과 사적 우정을 쌓아갔다. 사고의 세계에 머물 줄 알았고, 무엇보다 이를 즐겼다. 이렇게 생긴 습관이 관념주의자로서의 시작이었다 고백한다. 할아버지의 긍정적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교직, 작가의 업을 성직이라 부르는, 빅토르 위고를 무척 좋아하던 롤모델이었다. 문학의 향유, 장서를 탐독의 자세를 알게 모르게 배웠다. 지성이 대접받는 환경에서 자랐고, 많은 것이 할아버지 유산에서 기원했다.


시간의 흐름대로, '읽기', '쓰기' 두 장으로 나뉜다. 말이 오고 가는 두 가지 방식, 어느 쪽에 더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졌다. 환경의 영향이 결정적인 읽기는 언제나 가정사 중심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몰랐던 세상이 눈에 들어오긴 하나, 아직 '닫힌' 세계다. 이에 비해 쓰기는 자신의 선택에 바탕을 둔, 적극적으로 바깥세상을 향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었다. 읽기와 쓰기 사이, 상전이(phase transition)가 일어나는 지점을 주목하자. 사르트르에게 성장은 바로 이 전환을 뜻했다고 본다.


사르트르는 쓰기를 통해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탐색하게 된다. 더 폭넓은, 그래서 더욱 실세계와 연결될 여지가 있는, 지도상의 새 영역을 건설해나가며 마음껏 존재를 조각해나간다. 작가로서 초기 단계에 진입한 시점이자, 긴 여정의 출발이었다.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쓰기로 존재감을 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자유로운 상상이 담긴, 습작 냄새가 나는 글을 쏟아 낸다. 그리움이 담겨 있는 듯 느껴졌다. 글쓰기를 인생의 미션으로 삼아,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소명의식이 발동한다. 고작 10살 꼬마가 한 생각이다.


일찍이 평생의 업을 발견하고, 긴 시간 매진한 끝에 일가를 이루었다. 지침이 되어 준 내재된 흐름,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픈 욕구를 알 것도 같다. 어디서 근원하였나를 짚어보는 일은 지식인의 정체성이 달린 문제이므로 특별한 의미를 가짐에 틀림없다. 독립된 지식 생산자 길이 아무리 사르트르라도 쉽기만 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출발의 기억은 마음을 다잡게 한다. 업이라는 단어의 묵직한 부담을 이겨낼 자극이다. 사르트르 자신에게 ''은 그런 가치의 작품 아니었을까. 자기 길을 가려는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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