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드해서 바람직한 SF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을 읽고
'블레이드 러너'는 내 취향이 아니다. 과장된 설정에 거슬려했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게 어떻게 2019년인가!) '인터스텔라'라면 무척 좋아하는데, 검증된 물리학이 녹아있고 가족애라는 보편의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다. (과학이 포함된) 서사가 진정 힘을 발휘하려면, 가능한 한 현실과 맞닿아 있어야 할 것 같다. 과학은 실제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이므로 아무리 SF라 하더라도 억지가 많으면 곤란하다. 심하면 더 이상 진짜 과학에 근거가 없는, 이도 저도 아닌 망상이 된다. 과학이 괴상한 볼거리, 거짓말 섞인 환상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게 늘 불편했다.
앞서 말한 시각에서 '종이 동물원'의 빼어남을 발견한다. 사랑, 우정 등 인간 정서의 표현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동시대 우리 세상의 이야기다. 독자를 밀쳐 놓은 채 멀리 달아난 세계가 아니다. 타당한 경위로 과학 이론을 적용하고, 생뚱맞은 왜곡이 없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는 감각은 동아시아 근현대사라는 소재 덕에 더욱 강해진다. 작가의 배경에서 영향받았을, 동양적 공기도 한몫을 하는데, 한국 독자에겐 현실감 극대화된 상태로 읽히겠다. 각장 말미의 참고문헌, 관련 연구 소개 역시 비슷한 실제감을 낳는 요소다.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과학이 역할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자. 영국 낭만주의 어느 시인은 화학을 배우며, 영감을 얻고 작품 세계를 넓혀갔다 한다. 예를 들어 '원자와 원자가 결합하고 분자가 전기 에너지를 받아 분해되고..' 하는 이론. 세상 만물에 언제라도 일어나는 현상이면서, 인간관계의 메타포가 될 수도 있겠다. 참신한 시적 상상을 배울 기회였을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에서 유사한 예들을 본다. 서사의 뒷받침 도구로서뿐만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분위기를 강화하는 목적으로도, 과학이 쓰인다. 이탈로 칼비노의 '모든 우주만화'가 떠올랐다.
언젠가 수학과 과학이 담긴, 많은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종이 동물원'은 모범답안 같은 책이었다.